쓰다듬어줘, 총독님!
내 방으로 다가오는 그의 발소리. 다섯 걸음 앞까지 오는 동안 문에서 눈을 떼질 못하다, 네 걸음 남았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세 걸음 다 오기 전에 고개 돌리고 하던 일 하는 척. 그러다 그가 콩콩 문을 두들기면 또 모른 척.
“누구시오?”
“나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두 발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표정관리. 하지만 그래도 역시 좋아서 약간 남아버린 미소에, 마주 웃어주는 그 얼굴. 그대는 모르겠지. 그 때마다 내 가슴은 기쁨으로 뛰어오른다는 것을.
“무슨 일이오?”
이렇게 물을 때 내게는, 사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의 두 번째 귀병대, 나의 첫 번째 귀병대가 만들어진 지 벌써 년 단위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그를 사랑한 지도 그만큼이나 되었다는 뜻이다.
“내일 다시 오지.”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내 방을 나가, 문이 닫히고 다섯 걸음 멀어진 후에 나는 바닥에 스르르 드러눕고 말았다.
아아, 또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구나.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아, 신스케.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함께 하고 싶은 것 정말 많지만, 일단은 하루 종일 옆에 앉아있고 싶다.
꼭 붙어 앉아서, 내 머리나 뺨을 쓰다듬어줬으면. 가끔 보면 그는 나를 번견이나 애완견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 그 정도 꿈은 괜찮지 않을까. 포옹이나 입맞춤도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무리겠지.
혹시나 지금의 관계마저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 그 긴 시간동안 사랑한다고도 좋아한다고도 말을 못 꺼낸 나니까.
그대는 모르겠지. 내가 그대 일 앞에서만 이렇게 조그맣고 소심하게 되어버리는 것을. 다른 사람 앞 언제나 당당할 수 있는데, 그대 앞에서 하는 건 전부 강한 척이야.
“……잘까.”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슬슬 잘 준비를 할까. 빨리 자면 내일이 좀 더 빨리 올 테니까.
이불을 펴고 들어가 누우니, 감은 눈 안에 또 그 모습이 가득 찼다.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에 있던 베개를 빼어 꼬옥 껴안았다.
나의 신스케. 삶도 줄게, 목숨도 줄게. 혼도 백도 몸도 마음도 전부 그대의 것. 그러니까 나를,
그대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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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지? 분명 자려고 누웠을 텐데.
하지만 어느새 나는 늘 입는 코트에 선글라스와 헤드폰, 샤미센까지 챙겨 낯선 곳에 서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꿈 속?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생생한데.
바닥은 나무로 되어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대들보가 그대로 보였다. 건물 안인가?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벽이, 문이, 창문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넓은 건물인 걸까? 그게 가능한가? 발을 굴러보았다. 쿵쿵 소리가 났다. 쪼그려 앉아 바닥을 만져보았다. 분명한 나무판자의 감촉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 한숨을 쉬며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
“엇?!”
휘이잉-! 무척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것도 연기가 섞인 듯이 희뿌연. 여기는 실내가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이 색은 대체? 바람이 멈추고 나서야 일어섰다. 침을 한 번 삼키며 좌우를 둘러보려는 순간에,
“이봐, 여기야. 여기.”
바람이 불어온 방향에서,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혹시, 아냐, 아니, 설마. 조금 망설이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돌아보았다. 아, 저 감긴 눈과 짙은 눈썹. 분명 내가 알고 있는,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
“니조?!”
“오랜만이로군. 아직 날 잊지 않았나.”
어찌 잊을 수 있나. 나와 같이 그를 사랑했던 저 남자를.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서로 더없이 쓸모없는 경쟁심을 품곤 했던 나날들을.
“그래, 신스케는 잘 지내고 있겠지?”
“무, 물론이오. 헌데, 어째서 그대가……? 혹 소인, 지금 죽어서 그대가 있는 곳에……?”
“아냐, 아냐. 여기는 네 꿈속이니까.”
“꿈?”
정확히는, 너의 꿈에 혼령의 힘이 씌어서 만들어진 공간이지.”
“그, 그런……. 그렇다면 이곳을 그대가 만든 거요?”
“아니,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오늘 안내인으로 왔을 뿐이니까.”
안내인? 니조 말고, 나를 굳이 만나러 올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니조가 온 곳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니조는 짧게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직접 만나보는 게 빠르겠지.”
그리고 또 다시 바람이 불었다. 희뿌연 그것이 오른쪽에서, 그 다음엔 왼쪽에서, 그 다음엔 앞, 뒤, 그러더니 갑자기 왼쪽, 이번엔 또 뒤. 발 아래와 머리 위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마구잡이로 불어댔다. 그리고 그 뒤로, 흐릿한 사람의 실루엣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바람이 멈춘 후엔, 나는 어느새 서른은 족히 넘을 수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누, 누구요, 그대들은……?”
귀병대에서 죽은 자들일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향하는 시선들. 잠시 서로를 보다가도 어느새 나에게 돌아오는 눈들 속에서 분명하게 나를 향한 말이 들려왔다.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카와카미 반사이 군.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우리들은 양이 전쟁에서 싸웠던, 그 사람의 첫 번째 귀병대에 있던 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죽은 후까지 총독을 걱정하는 맘을 버릴 수 없어, 성불을 포기하고 그 남자를 끝까지 지켜보기로 한 이들일세.”
첫 번째 귀병대? 신스케의 옛 부하들? 과연. 그렇다면 납득이 간다.
“그렇군. 그대들은 그래서, 지금 신스케의 곁에 있는 자들이 믿을 만한 인물인지 확인하려는 거요?”
“이해가 빠르네, 반사이 군.”
“하지만 모두를 확인할 수는 없지. 그렇게 오래 머무르긴 힘들어.”
“그래서, 확인을 받는 건 자네 하나뿐.”
“소인만? 그렇다면, 어째서 소인을?”
“너는, 총독을 사랑하지?”
“윽?! 니, 니조-!”
“아냐, 내가 말한 게 아니야.”
“부끄러워 할 건 없다. 총독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던 건 너 하나 뿐이 아니야. 그 마음에 충성 외의 감정이 있던 것도 역시 너 뿐은 아니지.”
“자네 맘 이해해.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자네를 확인하고 싶어. 혹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지.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이해해줄 거지, 반사이 군? 너도 우리와 같은 자리에 있었으면, 똑같이 했을 거야. 그렇지?”
……아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렇다. 내가 없어지고 그 사람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생긴다면, 나 역시 그들 중에 신스케를 다치게 할 놈들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다른 일은 성불이든 환생이든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나처럼 그 사람의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이가 있으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싹싹 훑어서 검사하고 싶겠지.
“……알겠소. 그대들의 시험, 기꺼이 받아들이리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서, 그 시험이라는 것은?”
“일단, 눈을 감아.”
“감았소.”
“이제 천천히 열을 세고 나서 뜨게.”
또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1을 세는 순간, 이번엔 발 아래에서 바람이 솟아올랐다.
“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거센 바람에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펄럭이고 샤미센마저 덜걱거렸다. 사나운 정신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마저 숫자를 세었다. 3… 4… 5…….
“잘 다녀오라구.”
니조의 말이 끝날 즈음에, 어디선가 젖은 풀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
눈을 뜨고 보니 어딘지 모를 숲속이었다. 방금 비가 왔던 것일까. 축축한 공기.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내 머리로 똑 떨어졌다. 이크. 두 발짝 걸었다. 비에 눅눅해진 땅과 젖은 잎사귀의 질감이 전해져왔다. 근처에 있던 나무를 만져보았다. 딱딱하고 거친, 거기에 부드러운 이끼까지 낀 살아있는 나무의 감촉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자, 거의 머리 바로 위쯤에 해가 떴는지 수많은 잎사귀와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또 이파리 하나에서 똑. 이번엔 내 얼굴에 물이 튀었다.
여기가 시험을 받는 장소인건가? 이것도 환각? 아니면, 어딘가 다른 세계로 보내진 건가? 그보다,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지? 분명 물어봤었는데 대답을 듣질 못했다.
“니조? 니조-?”
이미 주변엔 아무도 없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조그맣게 물 떨어지는 소리 정도 뿐. 이미 시험이 시작된 걸까.
그렇다면 일단 내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겠지. 일단은 앞으로 걸어보았다. 숲을 빠져나가게 될지 더 깊이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가 있지 않을까. 아니라면 되돌아오면 될 테니.
30분 정도 걸었을까. 산책하는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멈칫. 살짝 헤드폰을 벗어보았다. 사람? 약간의 발소리. 내용은 알 수 없는 목소리. 그리고 흐릿하게……
피 냄새?
자세를 고쳐 섰다. 두 명 정도 될까? 싸워야 하는 상대일 지도 몰라. 전투 능력을 테스트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샤미센을 풀어냈다. 마침 나무가 많은 곳이군. 여기저기 현을 걸고 엮었다. 좋아, 와라. 이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곧바로 거미줄에 걸린 벌레로 만들어주마. 샤미센을 껴안고, 다가오는 정체 모를 이의 목숨을 연주할 준비를 마쳤다.
자, 와라. 저 쪽도 나를 눈치 챘는지, 발소리가 멈췄다. 주저하고 있을까? 이렇게 만들어놓은 이상 내가 먼저 공격할 수는 없다. 자, 어서 덤벼라. 이를 꽉 깨물었다. 당장 어디에서 와도 공격할 수 있다.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점점 빠르게, 잎사귀와 나뭇가지를 마구 밟으면서. 좋아, 와라! 바로 눈앞의 풀숲에서 튀어나오려면, 앞으로…… 어……?
저 걸음, 왠지 낯익은……?
“흐아아아아-!”
커다란 외침에, 파사삭 풀 헤치는 소리. 검을 든 사내 한 명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신스케?!”
“어?”
나의 외침에 그는, 신스케는 현에 닿기 두 걸음 전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너…… 나를 알고 있나?”
“아… 아……?”
신스케. 분명 신스케다. 하지만…… 조금 달라. 반짝이는 두 눈. 다리선이 드러나는 바지. 그리고 분명히,
조금 더 어린 얼굴. 그렇다면…… 그들이 있었던, 첫 번째 귀병대 시절의 신스케?
“그대는…….”
“으어아아아아아아-!!!!”
아까보다 더욱 커다란 외침과 함께, 이번엔 등 뒤 방향의 풀숲에서 또 다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잠깐, 여기 신스케가 있다면……?
“백야차?!!”
“어어?!”
이름으로 부른 게 아닌 탓인지, 그는 조금 놀라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망설이진 않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 아니오! 소인은 적이 아냐!!”
“아앙?!”
“으악?!”
소용없어! 가만있으면 베인다! 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채앵! 팔이 찌잉 울릴 것만 같은 그의 힘을 간신히 뿌리치며, 뒤로 튀어오르 듯 물러나 현을 당겼다.
“윽?!”
성공이다! 손과 발, 목과 허리가 묶인 백야차는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내가 조금 안도하려는 순간,
네 놈!”
등 뒤에서부터 곧바로 목덜미에 날카로운 것이, 닿지만 않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다가와 멈추었다.
아, 신스케. 검을 떨어트리고 양 손을 들었다.
“아, 아니오! 오해요!”
“헛소리 마라. 그럼 지금 이건 뭐지.”
“적이 다가오는 줄 알고 준비한 것인데…… 그대들도 마찬가지 아니오? 귀병대 총독, 타카스기 신스케?
그리고 백야차, 사카타 긴토키.”
“역시 날 알고 있는 거냐? 네 놈, 뭘 하는 녀석이지?”
“야 임마! 왜 내가 타카스기 다음이야?!”
고개를 돌리고 표정과 손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백야차에게 다가가 현을 풀어주고,
다시 빈 두 손을 들며 신스케를 돌아보았다.
“소인은 카와카미 반사이. 히토키리 반사이라고 불리고 있지. 양이 쪽 사람이오. 그러니까……. 윽?!”
퍽!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한 번 앞으로 휘청했다. 그리고 곧, 멱살이 잡혀져 빙글 돌았다.
“너 임마, 실수로 그런 거였으면 ‘잘못했습니다.’가 먼저지?”
“아, 아…….”
“뭐 하는 거냐, 긴토키! 지금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
“잘못했소! 미안하오, 백야차!”
“사과하는 거냐?!”
“그래, 바로 사과하니까 얼마나…… 어라? 이 놈 봐라?”
“어? 왜, 왜 그러시…….”
“이 녀석, 옷이 하나도 안 젖었어. 아까 그렇게 비가 왔는데.”
“뭐? 뭐야, 수상한데.”
“이상한 걸 입어서 그런가?”
그제야 나는 두 사람의 옷이며 머리카락이 꽤나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런.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고민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쑥.
“엇?”
“머리카락도 전혀 안 젖었잖아?”
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그의 손가락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야, 이거. 머리 쓰다듬…… 는 것하곤 조금 다르지만, 꽤나 비슷하지 않나?! 웃음이 나올까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얼굴이 달아오를 것만 같다. 자꾸 헤집어서 머리 꼴은 엉망이 되어가고 백야차는 내 코트자락을 들추고 바지 벨트까지 손대기 시작했지만…… 아니, 잠깐, 거긴 왜?!
“어이-!! 킨토키-!!!”
앗, 저 목소리는? 고개를 돌려보자, 또 다른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들 대체 뭐하는 건가?”
“광란의 귀공자와…… 카츠라하마의 용?”
“저 둘도 알고 있는 거냐?”
“어이, 쟨 그냥 목소리 큰 놈이야.”
“아니거든?! 그보다 그 쪽은 누구여?”
“설마, 막부군이라도 잡았나?”
앗. 나는 급히 다시 손을 들었다. 아마도 어색해보일 웃음과 함께.
“그러니까 히토키리 일을 하다가 걸려서, 숲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길을 잃었다 이거냐.”
“그렇소. 소인, 이 근방은 처음이라서.
마을로 내려가면 쫓길 상황이기도 하지만 이젠 마을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겠구려.”
낡고 좁은 오두막에 잡혀가듯 끌려가, 낡은 나뭇바닥에 앉혀지고, 몇 가지 심문에 적절한 거짓말을 뱉은 후에야 나는 샤미센과 검을 돌려받고 편히 앉을 수 있었다.
“뭐어, 우리들하고 비슷한 처지고만! 잘 됐지 뭐여. 당분간은 우리랑 다니자고. 자네를 쫓는 이들이 나타날 지도 모르니까 말여.”
신스케와 그의 친구들은 전투 중에 동료들을 잃어버렸고, 본대와 합류해야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조금 떨어진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고맙소, 사카모토 공. 그대들 네 사람의 용맹함은 익히 들었지. 함께 해볼 수 있어 기쁘구려.”
“뭐야, 이 녀석. 제법 괜찮은 소릴 하잖아?”
아까부터 나의 옷을 계속 들춰보고 선글라스 따위를 벗겨보던 백야차는 내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런데 그대는 아까부터 무엇을……?”
“네놈이 이상한 거 입고 있잖아. 눈에 이건 뭐야? 귀는 왜 덮었어?”
“그게…….”
“그만 하게, 긴토키! 반사이 군이 곤란해 하지 않나. 대체 아까 바지는 왜 벗기려고 한 건가?”
“그게 말이지, 이런 차림 하고 있으니까 속옷도 이상한 걸 입었을까 해서-.”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게! 미안하네, 반사이 군.”
“아아, 괜찮소…… 소인은…….”
나는 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문 쪽에 선 신스케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내 말을 거의 다 믿어준 모양인 사카모토와 일단은 믿어본다는 느낌의 백야차, 카츠라와는 달리, 그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 신스케. 그대가 그런 표정 하면 소인은 가슴이 아픈데.
“타카스기~! 자네가 그런 표정 허니께 반사이 군이 눈치 보잖어!”
“네놈이 너무 무르게 대하는 거잖냐. 그 녀석이 진짜 그 히토키리 반사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샤미센을 들고 다닌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얼굴에 그런 걸 쓰고 다닌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분장일 지도 모른다.”
“아, 아니오! 이것은 그저, 적에게 시선을 읽히지 않기 위해……”
“거짓말 마, 타카스기. 너 아까 이 녀석이 초면에 신스케라고 불러서 기분 나쁜 거잖아?”
“윽?!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금 그 부분이 문제가 아니잖아!”
“뭐여, 타카스기, 그런 거였고만!”
“그치. 방금 너한테는 사카모토 공이라고 해놓고 자기한텐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그 녀석이 잘못한 건 맞지만……!”
“반사이 군, 왜 그런 짓을 했나? 어서 사과하게!”
“미안하오. 소인이 잘못했소.”
“즈라 넌 왜 초면에 부모 노릇을 하고 있는 거냐?!”
“앗하하하-! 그래도 사과 하잖어.”
선글라스와 헤드폰을 벗어서 옆에 내려놓고 그를 향해 똑바로 무릎을 꿇어보였다. 신스케,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가 꿈인지 환각인지 현실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어느 것이든 그대에게 미움 받는 것은 싫어…….
“……쯧. 그래, 미안한 것 알겠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름으로 부른 거냐?”
“역시 그거 신경 쓰고 있었잖아.”
“시끄러워!”
“그, 그게…… 소인은…….”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해라.”
나는 미래에서 온 그대의 부하, 같은 소릴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지금 말을 들어주려는 만큼의 신뢰조차 잃고 말 것이다. 안 돼, 신스케. 침을 한 번 느릿하게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소인은 그대의…… 팬이오.”
“뭐?”
“뭐?”
“그……, 그거 있잖소. 유명한 사람이나 대단한 사람 말할 때 보통 님이나 씨나 공이나 그런 거 안 붙이잖소.
오다 노부나가라던가.”
“예시가 왜 그래.”
“아, 아무튼 그러니까 소인은…… 그대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바 있지.
분명 멋진 사람이리라고 생각하고 동경하고 있었소. 직접 보니까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소.
미안하오.”
“으음…….”
“뭐야, 그럼 괜히 만난 거 아냐? 실망했겠는데.”
“어? 아, 아니 소인은…….”
“하긴, 겨우 만났는디 그렇게 쏘아보니께 반사이 군이 시무룩하잖어.”
“생각보다 쬐끄매서 이거 아니야, 한 거 아니고?”
“……죽는다, 긴토키.”
“보는 앞에서 협박하지 말게. 반사이 군, 이해해주게. 저 녀석이 원래는 착한 아인데…….”
“너도 하지 마, 즈라.”
“반사이 군, 솔직하게 말해도 돼. 생각보다 키도 작고 키도 작고
성격도 나쁘고 키도 작아서 실망이라고……. 윽?”
미간을 구기며 다가온 신스케가 백야차의 멱살을 꽉 쥐어 자신을 향해 돌렸다. 아, 역시 화내나.
“네 놈, 긴토키……!”
“봐라, 반사이 군. 이런 녀석 동경해봤자…… 아욱!”
“앗?”
신스케는 백야차를 넘어뜨리더니 발로 퍽퍽 소리가 나게 차고 밟았다. 어? 어? ……아아, 그렇구나. 친구들과 있을 때 그대는,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었구나.
나머지 두 사람이 말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바로 옆에서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스케의 헛발질이 내 턱을 차서, 뒤로 구르고 말 때까지.
“윽!”
“앗.”
“반사이 군!”
“뭐하는 건가, 타카스기! 자네, 괜찮나?!”
“아, 아아, 괜찮…….”
“바카스기! 뭐하는 거야, 정말?”
“네, 네놈 때문에……!”
“안 되지, 타카스기 구운~? 제대로 사과 해야지?”
“으윽…….”
나를 때린 미안함보다는 백야차가 놀릴 구실을 준 것에 대한 기분 상함이 더 우선인 것 같은 얼굴로,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안하다. 많이 아픈가?”
“……아니, 괜찮소.”
……귀여워. 내가 아는 신스케와는 다른, 그러나 분명 내가 아는 신스케와 같은 그 모습에,
평소의 그를 보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정말이지, 타카스기…….”
“아, 아무튼 소인, 그대를 보고 실망하거나 하진 않았소. 생각 보다 그…… 재밌는 사람이구려.”
“엇.”
“뭐어~? 뭐야, 반사이 군, 취향이 특이하잖……”
“킨토키, 조금 가만히 있어.”
“신스…… 아니, 타카스기 공. 소인은 오히려 확신했소. 그대 같은 사람을 따르는 건 분명 매력적인 일이리라고.”
“어엉? 정말로……”
“타츠마, 자네도 좀 조용히 해.”
“짧은 시간이라도 좋소. 이 숲을 나갈 때까지 만이라도, 그대를 따르게 해주지 않겠소?”
“……흥.”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히죽 웃었다.
오두막은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잡았을 뿐, 머무는 곳은 아니라고 했다. 그곳을 떠나 30분 정도 걸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사람의 기척을 눈치 채고 멈추었다. 열 명? 스무 명? 그들이 조용히 검에 손을 가져다 댈 때, 나는 손바닥을 들었다.
“잠깐.”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눈동자들. 이들의 실력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지금 우선할 것은 그 쪽이 아니다. 신스케 쪽을 돌아보며, 살짝 치아가 드러나도록 웃어보였다.
“소인에게 맡겨주지 않겠소?”
적은 스무 명이 조금 안 되었고, 눈에 띄는 실력자는 없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그들의 목을 현으로 얽기엔 충분했다. 내 말대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네 사람은 내가 마지막 한 녀석을 죽이는 대신 잘 묶어 나무에 매달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건가, 자네?”
“혹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진 않을까 해서.”
“와, 너무한디.”
“하지만 캐내는 것은 그대들이 해주지 않겠소? 소인은 정확히 뭘 알아야 하는 지 잘 모르니.”
“그런 건 내가 해주지. 야, 타카스기! 너도 와.”
금세 매달린 자에게 달려든 백야차를 보고, 신스케는 조금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리곤 내 옆에 먼저 서더니,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괜찮은 실력이로군.”
“아, 아아. 고맙소, 신스케.”
“…….”
“아, 앗! 미안하오! 그, 귀병대 총독!”
신스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것으로 조금은 나를 신뢰하게 되었을까? 아,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내 머리에 턱 손을 얹었다. 앗.
“……그래, 당분간은 끌고 다녀도 되겠군. 그 대신,”
그리고 그 손은 자리를 옮겨 내 턱을 받쳤다. 아아.
“나를 부를 땐, ‘총독님’이다.”
“……으응, 총독님.”
살짝, 지금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
물론 그 자리에서 죽진 않았다. 내가 있는 동안 해가 세 번이 지고 세 번이 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도 나의 목적도 진전된 것은 하나도 없이, 우리는 그저 숲을 돌 뿐이었다.
나의 귀병대에도 세 번 해가 지고 세 번 해가 떴을까? 신스케는 내가 없어진 걸 눈치 챘을까?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곳의 어린 신스케의 얼굴을 보면, 불안도 뭐도 사르르 녹아 아무 생각이 없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장난을 치고 싸움을 하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져서, 그들의 장난에 당하거나 싸움에 말려들어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세 번째 해가 뜬 아침. 사카모토를 따라가 적당한 물가에서 몸을 씻고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니, 신스케와 백야차가 서로 멀찍이 서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젓던 카츠라만이 돌아온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다 씻었나.”
“으응. 근디, 쟈들은 또 싸웠나?”
“타카스기가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냐고 해서 말야. 하여튼 골칫덩어리야.”
계속 이렇게 있으니 신스케는 귀병대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다소 위험하더라도 어떻게든 뚫고 돌아가자, 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카츠라와 백야차는 반대했다. 여기서 우리가 죽는 건 그들에게 큰 손실이다, 죽지 못하고 인질이라도 된다면 더욱 큰일이다, 라는 게 카츠라의 의견. 몸 좀 사리고 다녀라, 바보같이 무작정 덤벼들지 말고, 라는 게 백야차의 의견이었다. 사카모토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으나 마나, 이 사람은 분명 이 세 사람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싶어 할 터였다.
“반사이.”
이쪽의 대화가 끝나자, 신스케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네 생각은 어떻지?”
“응?”
“타카스기! 반사이 군은 상관없는 문제잖나!”
“나를 따른다고 했잖아.”
“……그렇지. 소인은 총독님이 하자는 대로 하겠소.”
“아니, 반사이 군! 이럴 땐 말려야지!”
“약속을 했으니까. 그렇지, 총독님?”
“넌 도대체 저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킨토키, 쉿!”
전부 다 예쁜데, 라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신스케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앗.
“시, 아니, 총독님?”
“그럼 나는 이 녀석과 가겠어. 네놈들은 여기서 전쟁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나 해.”
“타, 타카스기!”
“타카스기이, 진정혀!”
“가자.”
“으응…….”
말리려는 두 사람을 신스케는 한 번 쏘아보더니, 나를 잡아끌며 척척 걸어갔다. 저 셋도 알고 있겠지. 신스케는 고집이 세. 쉽게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가라, 임마! 가! 고생이나 실컷 하고 질질 짜면서 오던가!”
백야차의 고함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척척 걸었다.
이 와중에 손잡고 걷는 것 같아서 기분 좋다고 생각하면 좀 그렇지? 슬쩍 한 번씩 뒤를 돌아보자, 그 때마다 신스케는 더욱 거칠게 나를 잡아당겼다.
“……괜찮겠소?”
오랜만에 분명한 목적을 향해 걷는 길. 그를 졸졸 따르며 내가 물었다.
“뭐가.”
“두고 온 세 사람 말이오.”
“흥, 따른다고 하더니 너도 결국 날 말릴 셈이냐?”
“그대가 그 셋을 걱정할까봐. 그대가 없어서 곤란하진 않을까 하고.”
“……하.”
그는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주 바라보자, 그가 멈춰 섰다.
“반사이.”
“응?”
“왜 이렇게 날 따르는 거지?”
“…….”
좋아하니까,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를 만난 지 나흘. 그는 믿지 않겠지. 반했다, 라는 건 말은 될 텐데. 분명 나는 내가 온 곳의 신스케를 처음 만나곤, 하루도 못 가 사랑에 빠졌으니까. 하지만 부끄러워. 이 상황에 할 수리도 아니고.
“멋있으니까.”
“응?”
“강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어. 그댈 만나기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매력적이오. 따라가고 싶어지는 사람이야, 그대는. 그러니까 총독님도 하겠지.”
“……잘도 말하는 군.”
“사실이잖소.”
“……흠, 흠.”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좋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앞장서라는 손짓을 해보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발그레한 볼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와 걷는 시간을 즐기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다. 끊임없이 적을 처리하느라 대화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 불안했다.
“……너무 적지 않소?”
그의 귀병대는 숲의 끝자락에 있는 신사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숲과 숲 사이를 지나는 작은 강, 그 앞에 선 낮은 절벽에 올라 그 신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우리가 싸운 횟수는 네 번 정도 되었고 벤 적의 수는 5, 60명에 불과했다.
분명 이상해. 이 숲에 있는 건 사천왕이라 불리는 네 사람이다. 그들을 견제하기엔 수가 너무 적어. 함정일까? 아니면, 남아있던 그 셋도 흩어져 그 중 한 명이 집중적으로 노려지고 있을 지도? 아니면……. 신스케를 돌아보았다. 그도 생각이 많아졌는지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돌아갈 수도 없다. 가자.”
돌무더기를 밟으며 절벽 아래로 내려가,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혹 함정이라면, 내가…….
휘익-!
휙! 무언가 날아드는 것에 칼을 휘두르자 신스케에게 맞기 전에 베여 툭 떨어졌다. 화살?
“앗!”
위험해! 절벽 위에서 반짝, 하는 것이 보였다.
“강으로 달려!”
소리치며 신스케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 이 위치에선 현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내 말에 따르는 그를 쫓아가며 날아드는 화살을 마구 칼로 쳐냈다.
물론 전부 다 막을 수는 없어, 내 팔다리가, 뺨이,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스케의 등을 가려야 해! 물속에만 들어가면 화살은 못 써! 그리고 건너가서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윽!”
콱! 등에 화살 한 대가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앞으로 살짝 휘청했다. 신스케는 내 목소리에 조금 놀란 듯 했으나,
“빨리!!”
내가 곧바로 외치는 소리에 지체 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나도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첨벙! 맑은 물에 내 피가 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신스케는?! 아, 다행이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아.
거센 물살에 쓸려갈 뻔하며 겨우 반대쪽에 닿아, 그제야 화살을 뽑고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우와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숲속에서 검을 든 수많은 장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함정에 머리를 들이민 모양이라고 농담이라도 던질까 했으나, 이 세계의 그는 그런 말에 대꾸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적의 머리며 나무의 허리를 밟고 뛰어오르고,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현을 걸어 적의 목이며 팔다리를 감고 매달아 베어 죽였다. 몇 명이나 상대했을까? 그도 나도 쉼 없이 싸우는데 끝이 보이질 않았다. 신스케가 지쳐버릴 텐데. 원군이라도 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슬쩍 돌아보았다. 그 순간,
"크윽!”
“신스케-!!”
신스케의 왼팔에, 칼날 하나가 제법 깊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바로 달려들어 그 앞에 선 자의 목을 베었다. 윽! 빈틈이 생긴 나의 어깨로, 검 하나가 달려들어 깊이 할퀴고 지나갔다.
“반사이!”
그의 검이 곧 내 뒤에 선 자를 찌르고, 나와 그는 등을 마주대었다. 헉헉 몰아쉬는 가쁜 숨. 등에 느껴지는 축축함은 땀? 아니면, 피? 설마 그대의…….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총독님이라고 부르랬지……?”
“……총독님.”
“뭐냐.”
“……소인이 그대 등을 맡겠소.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대를 신사까지 보내줄게.”
“……뭐?”
“그대 동료들과 합류하시오. 그것만 생각해. 할 수 있지?”
“그럼 너는……?!”
“시간 없소! 빨리!!”
현을 휘둘렀다. 좋아, 일단 당장 앞에 있는 놈들은 다 잡았다. 나무에 막히지 않았다면 좀 더 수월했겠지만, 괜찮아. 할 수 있다. 조금 머뭇거리던 신스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쫓아!’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둘까보냐! 곧바로 신스케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돌아서며 이를 악 물었다. 덤벼라! 네놈들의 상대는 내가 한다!
나무 사이에 발목 높이로 현을 걸면 넘어트릴 수 있다. 목이나 허리 높이라면 운이 좋다면 그대로 돌진해 베이게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검을 휘두를 뿐이야. 앞으로 달리다가 뒤돌아 뒤로 걷고, 그리고 또다시 뒤돌아 신스케를 따라
가기를 반복했다. 왼팔이 젖은 채로 끊임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적들과 싸워나가는 그의 모습이, 늠름하지만 그보다 애처로웠다.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조금씩 어지러워왔다. 저들에게 베이고 스친 몸 여기저기에 피가 배어나왔다. 자꾸 맨손으로 현을 만진 탓에 손도 멀쩡하지 않았다. 아까 등을 맞댔을 때 느꼈던 건, 내 피였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쓰러질 수는…….
휘익-!
콱! 등에 또다시, 아까 전 느꼈던 충격이 전해졌다. 화살! 아까 절벽에 있던 자들이, 이제 여기까지 온 건가?!
“신스케!!! 더 빨리!!!!”
“……!!”
“어서 가!!”
나는 몸을 돌렸다. 콰콱-! 이번엔 옆구리와 허벅지를 맞고, 또 몇 개가 몸 여기저기를 스쳤다. 으윽! 이를 더욱 악 물었다. 그를 놀라게 할 순 없어! 샤미센을 들어 휘둘렀다. 몇 대의 화살이 샤미센에 박히고 혹은 튕겨나갔다. 안 돼. 숨어서 쏘는 건 다 잡을 수가 없어! 이렇게 되면…….
등에 있던 화살을 급히 뽑아냈다. 샤미센을 등에 메고 뒤로 돌았다. 손에는 검만을 들고 신스케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막아줘야 해! 등 뒤로 휙휙 들리는 화살 소리. 오로지 고개로만 피하려고 애를 썼다. 콰콱! 콱! 샤미센에 박히는 화살. ‘머리! 머리를 노려!’하는 외침이 들렸다. 노려져도 어쩔 수 없어!
“으아아아아!!”
신스케! 나는 괜찮아! 그의 등에 닿기 직전이었던 검 하나를 쳐내고 그 주인을 베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뒤에 오던 한 놈의 목을 떨어트린 그 순간,
콱!
종아리?! 그 뒤로 콱! 콱! 또 몇 대가 내 다리 여기저기에 박혔다. 아, 안 돼……!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쿵! 신스케, 신스케?! 일어서려고 땅을 짚자, 베였던 어깨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파왔다. 으윽! 힘이 안 들어가. 일어날 수가 없어! 고개만 들어보았다. 아, 신스케가 멀어진다. 그래, 그대로 가!
나를 죽이러 오는 자들의 걸음소리가 점점 크고 거칠게 다가왔다. 신스케, 그대의 멀어지는 발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 하지만 이걸로, 그대가 지금 그대의 귀병대에 돌아간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데리러 오마!!!”
엇?! 돌아보지 않는 신스케가, 눈앞의 상대와 계속 싸우면서, 나를 향해 외쳤다.
“너도, 지금은 너도 나의 귀병대다! 반드시 데리러 오마! 그러니까, 죽지 마라!!”
……아, 그렇구나. 이곳의 그대는 그런 사람이었지. 다행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죽어도, 귀병대로 죽을 수 있어.
옆에 다가온 자가 내 목을 내려치려 검을 들었다. 조금만 더! 검을 꽉 쥐고 몸을 틀었다. 저런 말 들으면, 마지막까지 할 수 밖에 없잖아.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나의 신스케는 내가 없어졌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한 번만 더, 그대를 만나고 싶지만……. 한 번만이라도, 그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했지만…….
그대는 모르겠지. 신스케, 총독님, 처음 만난 그 날부터 그대를 계속 사랑했어.
누군가 한 명의 다리를 베고, 눈 바로 앞까지 칼날이 다가왔다. 아, 이제 끝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자, 여기까지.”
휘이잉-!! 거센 바람이 불었다. 안개처럼 희뿌연 그것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이건?!
질끈 눈을 감았다.
***
“눈 떠, 반사이.”
익숙한 목소리. 느릿하게 눈을 떴다. 차갑고 딱딱한 나무 바닥. 머리 위엔 대들보. 기둥 하나 없이 선 공간에 모여 있는 사내들. 그 앞에 선 니조.
“신스케……! 신스케는?!”
“걱정 마. 전부 이 자들이 만든 환각이니까. 자네 몸을 확인해봐.”
몸? 아, 상처가 없어. 옷에는 찢어진 자국은커녕 흙먼지 하나 없고,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벌떡 일어섰다. 마지막에 ‘여기까지’라고 말했던 남자를 찾아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아…….”
“아무리 환각이라고 해도! 어떻게 신스케를……!!”
“미안해! 우리도 가짜로라도 총독을 다치게 하는 건 싫었지만……!”
쥐고 흔들어대자 옆에 있던 자들이 우르르 다가와 나와 그 남자를 떼어놓았다. 씩씩 숨을 내쉬자 누군가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미안하다. 너의 총독님에 대한 마음을 알아보려면, 이런 방법이 최선이었어.”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우리들 모두, 자네를 신뢰하게 되었어.”
“총독을 지켜줘서 고마워, 반사이 군.”
“이제 우리는, 너에게 믿고 맡길 수 있어. 그렇다고 성불하진 않을 거지만.”
아아……. 그렇겠지. 다들, 싫어도 어쩔 수 없단 마음으로 한 거겠지. 진짜로 살아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렇다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러기를 바라면서 화를 내었다.
“……소인도, 감사하오.”
“응?”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스케가, 친구들과 함께 지나는 모습을 봐서, 그 순간은 진심으로 행복했소.”
“…….”
그들은 서로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이고, 몇 명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일은 끝났어. 이제 가볼게.”
“아, 아! 잠깐!”
“음?”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소?”
“무엇을?”
방금 전, 환각 속에서 보았던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떠올렸다.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만일 소인이…… 끝까지 신스케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두고 그렇게 죽게 된다면…… 그 때, 소인도 그대들과 함께 할 수 있겠소?”
앗.”
“물론이지, 반사이 군! 나는 환영이야!”
“니조 군도 조금 더 우리와 함께 할 것 같으니…….”
“더욱이 자네가 그렇게까지 해준다고 하면, 우리에겐 오히려 고마운 일일세.”
“……감사하오!”
활짝 웃어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보이던 미소가, 작은 소리로 바뀌었다.
“다들 가버렸군.”
나타날 때와 달리 그들은 갈 때는 스르르 사라졌다. 넓은 공간에 나와 니조 두 사람만이 남았다.
“나도 슬슬 가볼까.”
“그 사람들을 따라가는 거요?”
“그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군.”
“…….”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자, 그가 기운 빠지게 웃었다.
“사실, 네놈이 신스케의 바로 옆을 차지하려는 게 배가 아파서 조금 골탕먹여줄 셈으로 안내인을 자처했지만,”
“뭐요?”
“네가 그렇게까지 하면 신스케를 맡길 수밖에 없군. 부디, 그 목숨 신스케에게 잘 써줘.”
“……당연한 소릴. 하지만, 최대한 오래 버틸 테니까 느긋하게 기다리시오.”
“그러지. ……그럼 이만.”
“……몸 건강히 지내시오.”
“그래. 몸은 없어졌지만 말야.”
그는 또 흐흐 웃으며 스르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도 남지 않은 주위를 둘러보자, 잠이 오는 것처럼 눈이 감겼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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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눈을 떠보니 나는 이불 속에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해. 아, 그랬지. 꿈속이라고 했었지.
나는 정말로 그들을 만난 걸까? 이불을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흐른 시간은 겨우 하룻밤인데. 단순한 꿈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정말로 며칠 동안 겪은 일처럼 느껴져.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면 뭐 어떤가. 사실이면 뭐 어떤가.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데.
내 방으로 다가오는 그의 발소리. 다섯 걸음 앞까지 오는 동안 문에서 눈을 떼질 못하다, 네 걸음 남았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세 걸음 다 오기 전에 고개 돌리고 하던 일 하는 척. 그러다 그가 콩콩 문을 두들기면 또 모른 척.
“누구시오?”
“나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두 발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아니, 오늘은 숨기지 않고 활짝 웃었다. 조금 놀라는가 싶더니, 금세 마주 웃
어주는 얼굴.
“뭐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응.”
“응?”
“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윽, 실수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신스케가 흠흠,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그는 살며시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어? 어?!
“어제 하던 얘길…… 마저 할까……?”
아, 아……!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쓰다듬고, 헝클어놓았다. 울컥, 눈가가 젖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뭐냐.”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렇게까지 부끄러워 할 일이냐.”
그는 또 헛기침을 하며 옆에 앉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척하며 급히 눈가를 닦았다. 무슨 일이지? 신스케가 어째서?
설마, 그 사람들이 무언가……?
“반사이……?”
고개를 들었다. 히죽 웃어보였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총독님?”
“……뭐야, 갑자기.”
“뭐 어떻소. 그대 부하인데. 가끔은.”
“……그냥 신스케라고 불러라. 그 편이 편하니까.”
“응, 응.”
그대는 알까. 내가 어젯밤 한 번, 그대에게 목숨을 바쳤다고. 그
대는 알아줄까. 나는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그대를 위해 살고 죽을 거라고. 이 마음만은, 강한 척이 아니야. 나는 그대의 것이니까.
“……왜 자꾸 웃어?”
“그냥, 날씨가 좋아서.”
“실없긴…….”
이 마음, 이 기분, 평생 전해지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그대 옆에 있으니까.
그가 또다시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