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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

D의 흔적

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유메노 겐타로는 창문을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 있던 탓인지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어깨와 굳은 등을 펴기 위한 스트레칭과 가볍게 목을 돌렸다. 뭉친 뒷목이 뻐근해 저도 모르게 짧은 침음이 흘렀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노트북을 오래 들여다보아 그런지 눈앞이 다 침침한 기분이었다.

 

검지로 미간을 살살 누르며 노트북 옆의 탁상 달력을 확인했다. 벌써 마감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데드라인까지 합친다면 며칠의 말미가 더 주어지지만 그래나 저래나 매한가지. 어쩌지, 아직 절반을 조금 넘긴 분량의 원고를 보고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그램에 타이핑 된 마지막 글자가 까맣게 점멸하는 걸 가만히 주시했다. 커피라도 마시고 생각을 다스리자 싶어 노트북 옆의 머그잔을 들었다. 분명 책상에 앉을 때 뜨겁게 내린 커피였는데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절반쯤 남은 커피는 이미 향조차 나지 않았다.

 

첫맛은 쓰고 점점 단맛이 나는 이 커피는 아리스가와 다이스가 제법 좋아했었다. 선물 받은 뒤로 찬장 구석에 처박아 뒀던 걸 다이스가 찾아내어 주방 한 구석을 차지하던 기계에 넣어 내렸다. 뜨거운 잔을 받고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이 정도는 기본이라며 웃었더란다. 새까만 커피에 이는 파문을 바라보며 그리 생각하고 있더니 문득 다이스가 보고 싶었다.

 

아리스가와 다이스라는 인간이 연락두절이 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늘도 그랬고. 이삼일정도야 일상이었고 오일이 넘어가는 경우는 공중전화로도 전화를 해왔었다. 마땅히 집이랄 게 없으니 잠만 재워달라던 다이스를 창고 겸 서재로 쓰던 방을 내주었다. 방 한 편을 채운 책장이며 구석에 먼지 쌓인 상자들도 만족스럽다며 좋아했었다.

 

잠만 재워달라고 해도 정말 그럴 수야 있나, 그 정도로 겐타로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고 고양이를 하나들인 기분으로 그를 대했다. 요컨대 생활공간을 내어주고, 밥도 주고, 정까지 줬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한 번 나가면 들어올 생각을 하질 않는 도박광 고양이에게 정을 붙인 제 잘못이라며 얼마나 자책했는가. 기르던 고양이가 산책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 걸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글쎄, 그거로 위안이 될까. 저녁식사를 만들 량을 핑계로 그날 들어올 건지 아닌지는 연락을 꾸준히 하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휴대폰이야 이전에 판돈으로 내던진 지 오래였다. 말을 들어야 그것도 소용이 있지. 괜히 타들어가는 건 제 속이었다.

 

이미 식은 커피를 바라보며 원망 아닌 원망을 하고 있었을까 겐타로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휴대폰에 등록 해놓지 않은 번호에서만 울리는 벨소리였다. 누구일까, 다이스였으면 좋겠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의 주인은 정말 그였다.

 

여, 겐타로. 하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태평한 목소리에 속이 상하는 쪽은 겐타로였다. 뭐예요? 수화기 너머의 태평한 목소리에 겐타로역시 태평하게 대꾸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태평하다기 보단 퉁명한 쪽에 가까웠으리라. 그 기운을 감지했던지 다이스의 목소리에 자그마한 당혹감이 도는 게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졌다.

 

어, 어? 별 건 아니고…

 

별 게 아니면 연락 할 일 없었겠죠.

 

그건 그러네, 이해했다는 투로 돌아오는 대답이 참으로 그답다고 생각했다. 바보네요 다이스는. 평소처럼 가볍게 놀리자 발끈하는 목소리를 듣자니 어쩐지 기운이 돌았다.

 

그에게서 온 용건은 간단했다. 오늘은 집에 들어갈 테니 저녁을 사서 오겠다는 이야기였다. 저녁이라, 그러고 보니 곧 저녁시간이다. 일에 치여 생각도 못하던 저녁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식욕이 돌았다. 아무거나 사와요. 그 후 간단한 안부를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번호를 다시 보니 일련번호인지라 아마도 공중전화려니 싶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미 꺼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우스를 두어 번 흔들어 다시 화면을 켰다. 적어도 오늘 분량은 끝내야지. 무얼 사오련지는 몰라도 밥과 다이스의 생각에 겐타로는 어쩐지 원고를 다시 잡을 기운이 생겼다. 다이스가 온다면 가벼운 잔소리도 하고 밥을 먹어야겠다. 청소도 시켜야지. 그리고 커피도. 어쩐지 빈 머그컵에서 진한 커피향이 풍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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