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펜촉.png
라벤더.png
타자기.png
토끼의 그림
토끼
검정 잉크 방울
순록의 그림
flowers-2355455_1280.png
라벤다.png
아몬드.png
축음기

​겨울을 보내며.

"네가 없으니까 너무 춥잖아."

쾌청한 겨울바람 아래서 그가 말했다. 콧등을 벌겋게 붉히고서,  여미지도 않은 외투 안쪽 목덜미가 깊게 파인 네크라인을 따라 길쭉하게 드러났다.

"⋯⋯."

이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할까. 외출을 나서자마자 맞닥뜨린 불청객의 얼굴을 겐타로는 무던한 눈길로 마주하려 노력했다. 그의 마음을 반영하듯 녹슨 경첩이 끼이익 성마른 소리를 내었다. 좁게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건조한 바람이 휑하고 지나가자 푸른 머리의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폈다.

"그냥. 그렇다고."

그는 머쓱하게 코 아래를 문지르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는 마치 지나가다 겐타로를 발견한 것처럼 스윽 몸을 돌렸다. 그 모양새에 겐타로가 움찔했다.

"잠시만요."

옆으로 드러난 귀가 새빨갰다. 보고 있는 겐타로가 견디기 어려워 목을 감싼 목도리를 풀어냈다. 기껏 건네주어도 주머니 속에 손이 나올 생각을 않아 목 뒤로 걸어 단단히 여며주었다. 그는 턱 끝을 목도리 안에 묻더니 그 바깥쪽을 별로 세심하지 못한 손길로 얹어 어루만졌다.

"가요."

"갈게."

배웅하듯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겐타로는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었다. 멀어지는 속도는 두 배가 되어 잠시 뒤 뒤를 돌아보니 이미 골목길은 비어 투명한 바람만이 살점을 에일 듯 작은 칼날을 들이 미었다.

푹 눌러쓴 겨울 모자와 두툼한 외투 사이로 휑한 목덜미가 움츠러들었다. 돌아가서 여분의 목도리를 챙길까 하다가 겐타로는 다시 걸었다.

아리스가와 다이스와 유메노 겐타로가 헤어진 지 2주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겐타로는 추위를 많이 탔다. 할머니는 그런 겐타로를 양말을 두 겹, 세 겹 신기고 누빔이 들어간 겉옷을 입히고는 목도리를 꽁꽁 묶었다. 밤송이같이 동글동글한 털 달린 방한용 귓집까지 씌우고 나면 겐타로는 커다란 양쪽 눈만 빼꼼히 내밀고 깜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옜다. 나가도 된다.'

현관을 나서면 두터운 옷가지 때문에 뒤뚱뒤뚱 펭귄걸음을 하다가 눈사람의 초석이 될 듯 데구르르 구르고야 말았다. 눈밭에서 얼굴을 떼기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익숙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고, 다리를 세우기 전에 따뜻한 마른 손이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켰다.

할머니가 직접 짠 분홍색 장갑 안쪽의 손가락은 그래도 차가워서 손을 잡고 걷는 할아버지의 맨살갗의 온기가 알게 모르게 넘어왔다. 미약한 온기라도 잡으려 추운 이마께를 손등에 문지르고는 아이답게 금세 흰 눈밭에 이끌려 놀았다. 그러다가 재채기라도 할라치면 못된 짓이라도 한 죄수처럼 잡혀 들어가 난롯가에 앉혀지는 벌을 받았다. 조금 뾰로통한 티를 내다가도 고구마며, 귤이며 단맛에 사로잡혀 잊고 잠들면 열이 오른 이마를 쓰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이곳 태생이 아닌 게지'

뭣 모를 어린 아이이지만 겐타로는 어렴풋이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가혹한 설국의 겨울을 설국 사람들은 모두 이겨낼 줄 알았다. 피에 새기어 내려져 온 듯 날 때부터 마냥 익숙했다. 이곳에서 터를 잡고 태어난들 그는 따뜻한 남쪽의 아이였다. 얇은 홑겹의 할아버지가 따뜻해지는 동안 겐타로는 계속해서 차가워져갔다. 왜 차디찬 자신이 설국에 어울리지 않는지까지는 어린 머리로 닿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대신에 그곳에는 서늘한 여름이 있었다. 추위를 무던히 넘기는 사람들은 서늘한 여름마저 더워했다. 아이들은 저 멀리 만년설에서부터 시작해 녹고 식은 개울에서 물장구를 쳤다. 겐타로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곡에서 겨울의 흔적을 엿보았다. 고개를 들어 우뚝 솟은 산꼭대기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해가 지표면을 달구기 전, 파릇한 새벽의 온도도 버티지 못하는 그는 여름이 그리 덥지 않았다. 아침마다 입고 가방에 넣어 돌아오는 갈색 카디건에선 이방인의 냄새가 났다.

도쿄에 내려와서도 겨울은 추웠다. 허리께까지 쌓이는 눈의 세상 대신 질척질척한 겨울비가 그를 반겼다. 그대로 얼어버릴까 노심초사한 첫 겨울의 새벽에는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남은 잔해가 길 틈 사이로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다. 창밖의 세상은 새로웠지만 매년 달고 살던 감기는 그치지 않고 찾아왔다.

"콜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겐타로는 옷깃을 여미며 마른기침을 뱉었다. 올해는 이렇게 감기가 찾아올 모양이었다.

품속에서 꺼내는 작은 열쇠마저 시렸고, 밀고 들어가야 하는 철제 대문은 여름엔 손도 대지 못하게 달아올랐던 주제에 손이 붙어버릴까 걱정해야 했다.

여름.

덜어진 추위만큼 이곳의 여름은 더웠다. 씁쓸하게도 겐타로에겐 견딜만한 더위였다. 여름 아침의 바람에도 쌀쌀한 기운을 잡아내곤 하던 그였기에. 버티고 버티다 턱에 굴러 내리는 땀 한 방울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내면 그만이었다.

'네가 없으니까 너무 춥잖아.'

바보 같은 사람. 있어보았자 겐타로는 차가워지기만 할 뿐 나눠줄 온기 따위는 없었다. 되려 겐타로에겐 올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진득한 땀 냄새를 풍기며 자꾸만 달라붙는 남자를 귀찮아하면서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36.5도 어딘가의 체온이 여름날의 온도보다 시원할 리가 없는데도 덥다며 그에게 치대는 다이스의 상체는 이미 땀범벅이었다. 선풍기 앞으로 쫒아내 보아도 네가 더 시원하다는 앙큼한 거짓말에 겐타로는 넘어가버리곤 했다. 새어나갈라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둘만의 밀어를 속삭이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던 그해 여름. 열사병에 가까웠던 뜨거웠던 날들.

그 마음의 온도차가 너무 커서 올 겨울 감기는 지독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작년 겨울은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어느 파칭코 뒷골목에 구겨 앉으며 다이스는 생각했다. 골목은 굽이져서 바람을 막아주면서도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 작년에도 꽤 애용했던 곳이었다. 옆 가게에서 내놓은 음식물쓰레기 냄새를 피해 슬쩍 엉덩이를 옮겼다.

걷혀 올라간 발목이 얼얼했다. 시큰거리는 게 관절인지 살갗인지 원, 뼛속까지 시리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양 발목을 잡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 그때만큼은 잠시 뜨끈했다. 손을 모아 호호 불다가 벽에 등을 기대니 목도리의 올이 거친 벽돌에 쓸려 투둑거리는 소리에 등을 세웠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시 등을 기댔다. 담뱃재와 모래가 섞여 흙 비슷한 먼지가 옷자락에 묻어났다. 내일 따는 돈으로 씻어버릴 얼룩이지만 목도리에는 차마 묻힐 수가 없었다. 콧등까지 목도리를 끌어와 덮던 다이스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돌려는 줄 수 있으려나.'

구질구질하게 찾아간 옛 연인의 집 앞에서 마주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고는 하나 막상 만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도망치는 것과 다름없이 발을 떼는 다이스를 붙잡은 건 도리어 겐타로였다. 방금 전까지 그의 숨결 앞에 있던 목도리에서는 그의 냄새가 났다. 그 마음씨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붙잡던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던 손길을 아직 기억했다.

촌스러운 주황색 목도리는 겐타로를 꼭 닮은 것이 그다워서 마음에 들었다. 노란 불빛의 쇼윈도 앞에 서기까지는 그랬다. 어쩜, 이렇게도 안 어울릴 수가 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이스가 입고 있는 모든 옷 중에서 홀로 붕 떠 선 주홍색 섬이 키 작은 사람들 머리언저리에서 둥둥 떠다녔다.

정말, 이렇게까지 안 어울릴 필요는 없잖아. 혼잣말이 나오려는 걸 뭉텅이로 삼켰다. 봄부터 시작해 겨울이 다 오도록 함께했는데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는 부분이 없었다. 그걸 깨닫자 왠지 이 촌스런 목도리에 얼굴을 더욱 묻고 싶었다.

'추워!'

생각이 이어질라치면 딱딱 부딪히는 아래턱이나 부들부들 떨어대는 몸이 방해해댔다. 고개를 꺾어보니 네모로 조각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게 눈, 비 걱정도 없고 특별히 동장군이 온단 말도 못 들었는데 오늘은 왜 이리 다른지 모르겠다. 별 의미 없이 발을 동동거리다 웅크리고 누웠다. 와중에도 목도리는 외투 안쪽으로 꼭꼭 밀어 넣었다. 목이 약간 졸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당면한 문제는 동사지 질식사가 아니었다.

깜빡깜빡 꺼지는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무의식은 생각했다.

역시 네가 없어서 추운 거라고.

 

"정신 좀 차려요!"

돌덩이 같이 굳어버린 뺨을 누군가 어루만지는 꿈을 꾼 듯도 했다.

짝!

음, 이건 확실히 쓰다듬는 손길이 아니었다. 어물어물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다이스의 눈앞에는 장갑을 벗어들고 씩씩거리는 겐타로가 있었다.

"겐타로?"

"미쳤어요? 얼어 죽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군요!"

여태 어루만져주는 줄 알았던 뽀송한 감촉은 저 장갑인 듯했다. 폭신폭신하니 툭툭 쳐대는 걸로는 어지간해서는 아프지 않을 듯싶었다. 그에 비해 뺨이든 손이든 양쪽 다 단단히 굳은 맨살갗의 접촉은 굉장했다. 다이스는 추위로 감각을 잃은 뺨 한쪽과 다른 의미로 얼얼해진 나머지 뺨 한쪽을 갖게 되었다.

"여긴 어떻게⋯⋯."

"그거야 당신이 자랑스럽게 가르쳐줬었죠. 한 세 달쯤 전에? 일어날 수 있겠어요? 세상에. 정말 어쩌자고 이 날씨에 노숙을⋯⋯."

겐타로는 다이스에게 말을 걸었다가 혼란스러운지 혼잣말로 말을 맺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스에게는 뺨을 쓰다듬는 손길로만 느껴진 조금 전이 겐타로에게는 뺨을 몇 번이나 쳐대도 일어나지 않는 반 시체 꼴이었던 탓이었다.

냉한 달빛이 푸르게 시린 밤의 공기를 받아 비추는 모든 것이 그랬다. 어둡거나 푸르거나 희게 질리거나. 그 밤에는 자신도 그리 보인단 걸 겐타로는 몰랐다.

다이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눈 밑으로 드러난 살짝 도톰한 볼이 다였다. 낮과 비슷한 차림새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둘 두르고는 주황색 대신 어두운 초록색 목도리로 얼굴을 감아 맸다.

참 포근해 보여 다이스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겐타로의 무릎이 꺾여 품 넓은 바지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다이스는 그를 제 위에 올려놓다시피 껴안아 그 품에 코를 비볐다.

"역시 따뜻해."

"다이스!"

거짓말일 게 분명한 숨결이 웅얼거렸다. 겐타로는 손을 뒤로 뻗어 다이스의 손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빳빳하게 굳은 양손은 도통 풀어질 생각을 안했다.

"다이스."

겐타로가 나지막하게 다이스를 불렀다.

"안 돼요. 이젠."

이제는, 이란 단어는 간결하고 멀었다. 그 말은 다이스를 길 가던 겐타로의 뒤를 습격했던 봄을, 끌어안고 목덜미를 부비던 여름을, 춥다는 그를 품에 넣고 제 주머니에 멋대로 손을 쑤셔 넣던 가을로 끌어놓았다. 하지만 기억은 점점 가까워져 손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겨울의 초입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을 털어내듯 떨친 겐타로는 뒤돌아섰었다.

"잠시만⋯⋯."

"다이스."

"알아. 아니까."

"⋯네."

"추우니까⋯⋯."

몸만 풀리면 바로 일어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일어나면, 집으로 가요."

당신 말대로 여긴 추우니까.

예비하지 못한 겨울은 잔인했다. 언제나 혼자 있는 겨울을 겪어왔는데, 단 꿈에 젖어 잊었나보다. 이제 다시 홀로 겨울을 나는 법을 준비해야 했다.

 

난로에서 은근히 뿜어 나오는 붉은 빛이 거실을 물들였다.

다이스는 등에 담요를 두르고 양 발바닥을 붙여 모아 앉았다. 겨우내도록 하고 있으리라 결심한 목도리는 현관에서 외투와 함께 빼앗겼다. 목도리는 원래 겐타로의 것이었으니 빼앗긴 건 외투뿐인 쪽이 좀 더 정확했다.

겐타로는 찻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리고 난로 옆에 둘러앉았다. 차를 끓일 요량인지 옆에 놓아둔 쟁반 위에 찻잎과 잔 두개가 나란했다. 다이스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란히도, 마주 앉는 것도 아닌 90도로 엇나간 방향이 지금의 관계에 대한 정의였다. 겐타로는 다이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손바닥을 들어 손을 쬐었다. 그러다 크흠, 하고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감기야?"

"조금요."

당장은 그랬다. 자고 일어나면 한바탕 앓아눕겠지. 그런 계절이니까. 설국이 아니더라도 겨울이 그에게 다정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해마다 마음속 눈은 녹지 않고 쌓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손 줘 봐."

속을 가늠하기 어려운 투박한 말투에 별 말 않고 손을 내밀었다.

"엑, 별로 안 차갑네."

"아무리 소생이라도 불 쬐면서까지 차갑진 않아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줄곧 난롯가에 앉아있던 다이스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서 겐타로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말 체온을 확인할 생각이었는지 다이스는 미련 없이 겐타로의 손을 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겐타로는 한시도 차가운 적 없었던, 그러나 조금 전 제 손만큼 싸늘했던 다이스의 손을 떠올렸다. 얼어붙기라도 한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이스는 그보다 좀 더 멀리, 제 손등이 내쳐지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느 하나 지금과 같은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주전자의 물이 끓었다. 겐타로는 그 사이 두어 번 더 기침했다. 일어나 차 두 잔을 따라 한 잔을 다이스에게 건넸다. 다이스도 말없이 양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이유 있는 침묵의 시간은 평온했다.

"있잖아. 겐타로."

"네."

다이스는 잔을 내려놓고 팔을 뒤로 뻗어 기댔다. 자연스레 고개가 들렸다. 익숙한 천장을 훑어보다 옆을 바라보았다.

"우리, 마지막에 왜 그렇게 싸웠을까?"

그렇게 말하는 입가에는 미소 비슷한 것이 떠있었다. 겐타로는 입을 꾹 다물려 애썼다. 모난 말이 나가려하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아니."

다이스는 훈훈한 공기에 따끔거리는 콧등을 긁적였다. 왜인지 슬그머니 시선이 비껴나갔다.

"우리 나름 많이 싸웠잖아.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네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나만 바보 같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겐타로는 그 어깨를 짚어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직도 잘 모르겠어. 왜 좋아하는데 헤어져야 해?"

겐타로의 손은 멈칫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어깨를 밀어 마주 보게 만들었다. 다이스의 얼굴에는 눈물자국 하나 없었지만 미간은 보기 나쁘게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고 또 몰랐다. 남아있는 마음이 숨겨질 리 없었지만 또한 그게 사랑의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모난 말의 뿌리에는 모난 마음이 있었다. 삐뚠 마음으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난 이후 겐타로는 그것을 들어 살펴볼 시간을 가졌다. 요모조모 훑어보고, 오랫동안 지켜보다보면 불투명한 부분이 어느 순간 반짝였다. 겐타로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다이스. 소생은, 마음이 조각이라면, 맞지 않은 부분은 깎이고 녹아서, 적어도 평생에 마지막 한순간은 꼭 맞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겐타로는 차분히 설명했다. 그들이 언성을 높여 다투고 이윽고 매몰차게 떨어져나갔던 그 순간을.

"그냥 깨달았어요. 조각이 아니라⋯ 우린 쭉 평행선이었어요. 닿은 적도 없고, 닿을 리도 없는, 가까워 보이는데 사실 세상에서 제일 멀어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니까, 맞지 않아 보이는 부분이 많은 건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한참을 뒤엉켜 굴러 마음 한 조각이라도 더 맞춰보려 애썼는데, 문득 앞을 보니 앞길은 나란한 평행선이었다.

그러니 이해가 갔다. 도박을 놓지 못하는 그를 기다리며 속을 썩이고, 진심어린 한 마디를 비꼬아 들어 다투고,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가 눈에 띄어 맞지 않았던 때들이. 다르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먼 거리들이 모여 도출해낸 답은 그랬다.

"⋯지금이라도 닿을 순 없는 거야?"

겐타로가 조용히 무릎 위로 양손바닥을 모아 펼쳐 보였다. 다이스는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변할 수 있었다면 이미 그랬겠지. 세상엔 바꿀 수 없는 게 많았다. 겐타로는 여전히 글을 쓰고 겨울을 힘겹게 날 터였다. 다이스도 도박을 끊지 못하고 더위를 못 견뎌 할 테고. 그냥 그런 것이었다.

무엇보다.

"변함없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다이스. 우리 헤어져요."

다이스의 손을 따스이 감싸 쥐며 하는 말은 어린아이에게 이르듯 다정했고 그래서 잔인했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까지 바랐던 손등의 온기를 다이스는 감히 떨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감내하는 것밖에는.

다이스는 한참을, 아주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겐타로는 그가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떠는 것을 다만 눈짓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연료가 닳아버린 난로의 붉은 경고등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명멸했다.

 

그 해의 감기는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듯 뜨거웠고, 강렬했고, 짧았다. 땀에 젖어 두꺼운 이불아래서 바르작대다 눈을 감았다 뜨니 재의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