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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이 넓은 우주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서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진 건 기적이 아닐까 하고요.  지금 이렇게 서서 당신과 마주보고 있는 이 순간이…가끔은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황홀해요.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몬.

 

      아주 긴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답답해, 하지만 어쩐지 가벼운 느낌. 루자미네는 눈을 깜박인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희미한 빛을 받은 광물들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하늘에서는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이차원의 짐승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그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모두 꿈이야. 나는 드디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거구나,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의 낙원. 이렇게 배웅해 줘서 기뻐! 그런 루자미네를 반기는 듯이 텅비드 무리가 다가온다. 텅비드의 촉수 하나하나가 그녀의 목과 뺨과 눈동자와 뇌수를 쓰다듬을 때마다 루자미네는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띄우며 기뻐했다. 마치 물 속에 떨군 잉크 한 방울이 빠르게 퍼져가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은 지금까지의 괴로움 대신 쾌락과 행복으로 번져갔다.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모두가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영원히 이곳에 있어줘요-   루자미네의 귀에는 그러한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 말에 감격한 루자미네는 정자세로 누운 채 그녀의 몸과 마음을 헤집는 텅비드 무리-마치 죽은 포켓몬 사체를 뜯어먹기 위해 모인 그라에나 무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의 손길을 그저 가만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기묘한 풍경에 섞이지 못한 채 그저 안절부절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구즈마였다. 그는 불과 몇 십분 전 까지만 해도 즐거웠었던 듯했다. 그는 루자미네를 좋아했고, 이 넓은 세계, 우주, 울트라홀 너머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단순한 기쁨은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뛰쳐나가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텅비드의 촉수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은 순간, 기쁨은 알 수 없는 공포가 되어버렸다. 텅비드의 촉수에서 분비되는 신경독의 원료는 분명 원초적인 쾌락과 행복에 가까운 것이었을 터인데, 구즈마는 오히려 그러한 감정에 압도당하고 짓밟혔다.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행복은 구즈마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래서 그는 루자미네도 그처럼 겁에 질려 있기를 바랐다. 그녀와 함께 이 거짓말 같은 환상에서 벗어나 지긋지긋하고 축축하지만 익숙했던 그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구즈마의 앞에 있는 사람은 꼭 요람 속에 뉘인 아이처럼, 무구하고 순백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구즈마가 모르는 루자미네였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둘은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너희는 그저 타인일 뿐이야, 영원히 같은 길을 걸어갈 순 없어, 언젠가는 결국 부딪히고 깨지고 망가지겠지- 구즈마의 귀에는 그러한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자 구즈마는 마침내 용기를 냈다. 그는 루자미네를 향해 손을 뻗어, 함께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리하여 꿈 속에서 둘은 마침내 타인으로 거듭나, 그들이 함께 자전과 공전을 일삼던 궤도를 이탈하여, 처음으로 서로의 두 눈을 바라보았고, 서로의 체온을 의식하였고, 서로의 살갗과 생채기와 균열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이루어 왔던 관계의 종식-또는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였다. 조용하고 반짝거리는 심해 속에서 파도가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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