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 조에
한지 조에가 두려워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도시를 떠도는 연쇄 살인범의 소문은 발원지를 추적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었고(한지는 실제로 이것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귀신을 믿기에는 너무 합리적이었다. 귀신이 존재한다면 탐구가 필요할 뿐이지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또는 부주의로 미처 저장하지 못한 연구 자료가 모두 날아가는 순간의 오싹함 따위는 물론 압도적이었지만 모블릿을 고용한 뒤로는 그런 걱정으로부터도 해방이었다.
한지 조에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 어떤 종류의 항공 운송 수단의 이미지나, 소리, 그 생각만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 잠시 내다본 창문으로 스쳐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두통과 함께 발작하듯 기절한 후에 알게 된 이 사실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한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공포였다. 원시적이라고 해야 하는지, 비행기에 타면 자신은 무조건 죽을 것 같은 아주 비논리적이고도 친숙하고,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에 대한 걱정에 한지는 한숨을 쉬었다. 여태껏 배편만을 이용해온 한지는 당연하게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초대받은 스위스의 학회가 다음 주였다. 다음 주까지 배를 타고 스위스를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귀신이 비합리적이라면서 비행기 추락사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니 한지는 마음대로 자신의 증상에 이름을 붙이며 자조하였다. 이번 학회는 한지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가설의 설정과 관찰, 실험 그리고 입증까지 한지가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공포를 극복하는데 사용한 과학적 방법론들은 결국 한지가 비행기를 타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젖힌 한지는 모블릿이 벽에 붙여놓은 원자 모형 장식을 가만히 보았다. 모블릿은 자신의 미적 감각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만, 저 모형은 이렇게 거꾸로 보니 비행기처럼 생겼네, 따위의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다시 바로 하는 순간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였다. 원자 공간 안의 전자의 위치도, 한지가 탄 비행기가 사고가 나는 것도 모두 엄격히 확률을 따랐다. 운명이나 귀신을 믿을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숫자, 아주 작은 숫자의 확률이 나타내는 현실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지는 확률에 영향을 주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을 조종하지는 못하나 스스로 확률의 곱을 조작할 수는 있었다. 한마디로 ‘설마’에 기대면 되는 것이다. 두 명 이상의 애인이 비행기 사고를 겪는게 가능하겠어, 라는 설마. 논리적인 허점이 없지는 않은 작전이었지만 이 정도면 한지가 믿고 자신의 공포를 짓누르기에 충분하였다. 가설은 세웠고, 입증만이 남았다. 한지는 비행기를 타려는 것보단 입증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지는 흥얼거리며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일주일 안에 비행기 사고를 겪은 전 애인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했다.
리바이 아커만
에렌과 미카사가 친 사고를 수습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으나 이 정도로 일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리바이가 보았을 때 미성년자인 조카의 남자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싶으니 돈을 달라는 요구를 묵살한 것은 보호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리바이는 왜 여자친구가 없냐고 묻던 귀여운 아이에서 옆에 에렌을 달고 다니는 사춘기가 된 지금까지 미카사는 직진하는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무표정으로 처음 보는 새 오토바이에서 책가방을 매고 내리는 미카사는 시동 소리를 듣고 쫓아나온 리바이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할 말을 잃은 리바이에게 미카사가 통보하였다. 삼촌, 삼촌 계약 연애 시작했어.
미카사가 리바이에게 들이미는 화면을 받아 읽은 리바이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어떻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왜 여태 솔로냐는 미카사의 질문에 반쯤 충동으로, 직감으로 사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첫사랑이 비행기 때문에 죽은 상처가 크다고 말해온 탓인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의 관리를 미카사에게 맞긴 탓인지 하여튼 모두 리바이의 잘못이었다. 리바이는 자신의 계정으로 미카사가 대화한 상대의 입금 내역 아래에 적힌 첫 만남 날짜와 시간을 보았다. 내일이었다. 그날따라 리바이의 프로필이 적힌 그가 근무하는 회사의 웃음로고(자극도 자국도 없는 세제! 크린프릭하세요!)가 참을 수 없이 얄미웠다.
리바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오토바이에 제 삼촌을 팔아버린 조카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지 조에
한지는 전날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연구를 자제하지 못한 자신을 가볍게 책망하였다. 어차피 이건 순수하게 실험 목적의 만남이었으니 잘 보일 필요는 없고 이미 대가도 치루었으나 최대한 말끔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는데 이미 실패였다. 로맨틱하거나 심지어 별로 건전하지도 않은 만남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한지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바빴다. 어쨌든 집에서 잠이 들기 전에 미리 나가자는 생각으로 뻑뻑한 눈을 문지르고 하품을 하며 리바이 아커만과의 약속장소로 나간 한지는 햇볓이 잘 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주 옛적의 구식 비행기가 태양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그것은 한지의 목숨이자 존재 이유였다. 그 하늘을 나는 고물은 아주 중요하다는 암시가 들어 한지는 그것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빌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무사히 날아 멀어지는 것인지 자신이 태양과 비행기로부터 추락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몸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불타는데 바람은 한가락도 불지 않고 익숙한 두려움으로 인한 두통만이 몰려오며 아, 나는 비행기를 타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타지 못하여 무서웠던 것인가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쳐가고 나서 들려오는 한마디가 한지, 지켜봐 줘-
“-지금 저 보고 있으신 거 맞나요?”
그녀의 앞자리에서 꿈속의 목소리와 찌푸린 얼굴과 검은 머리를 가진 리바이 아커만이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