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덥잖은 농담거리가 금세 떨어진 밤이었다. 한지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얼굴을 감싼 붕대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눈을 찌르겠다는 핀잔은 의미가 없었다. 방해를 받는 쪽의 안구는 이미 눈의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목숨이 오간 전투에서 별다른 애도조차 받지 못할 갈색 눈동자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리바이는 혀를 차는 대신 손을 올렸다. 작은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였지만 한지에게서 놀란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닥들을 정리해 한지의 귀 뒤로 넘기는 동안에도 내려앉은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이제는 너 밖에 없어, 따위의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사실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무시하고 싶을 만큼의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한지에게서 손을 떼는 생각은 왠지 저항감이 들었고, 리바이는 자신이 그냥 한지의 볼을 만질 핑계가 필요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의 손이 턱과 귀 밑을 스치자 하나 남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병사의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안타까울 정도로 부드러운 부분에도 작은 상처가 손에 긁히며 제 존재를 알렸다. 무언가에 밀린 것처럼 그가 몸을 두 뼘 앞으로 기울였을 때였다. 한지가 리바이를 불렀다. 리바이,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지. 그는 멈추었고 한지는 얼굴을 빼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음, 너랑 나라도 변하지 않았으면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그 때 그들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바보같은 말임은 틀림없었다. 모든 것이 변한 세상에 그들 둘만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책상에 앉은 채로 엎드려있는 한지와 그녀 옆의 술병을 보면서 리바이는 이것 좀 보라고 하고 싶었다.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 그런 말을 했으면서 술 먹을 상대가 없어 혼자 청승이나 떠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상상이 유치했다. 노려본 취객에게서 평소의 날카로운 명민함은 찾아볼 수 없어서 리바이는 맥이 풀렸다. 누가 입을 맞춰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 있는 한지의 얼굴에서 리바이는 겨우 안경을 벗겨냈다. 그녀의 미간이 몇 번 찡긋거리다 평온을 되찾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숨을 참았음을 깨달았다.
단장의 책상에서 술병과 잔을 치우면서 리바이는 변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침대에서 자기 시작한 자신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시간이 되면 누워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도 모호한 이유로 책상에서 선잠을 자는 습관은 버려졌다. 그 대신 술친구를 찾아 자신의 방을 찾던 한지가 이제 혼자 뻗어 책상에서 자는 것인가, 리바이는 단순한 연상을 했다. 제때 씻기 시작한 한지도 있었다. 공식 석상에 대표로서 얼굴을 비칠 상황이 늘어난 그녀는 과로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도 자주 씻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씻겨져 피로와 때가 벗겨진 한지의 분노에 거인을 잡아주겠다고 마지못해 약속하던 일은 전생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한지가 씻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를 기절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를 씻기던, 유능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분대장의 기행을 받아줄 반원들은 한 명도 살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와 내가 변하지 말자는 말은 소용이 없는 거야. 조심스레 찬장을 열어 반쯤 빈 술병을 넣어놓으며 리바이는 조용히 혀를 찼다. 벽 밖의 자유가 허상으로 밝혀진 세상에서 조사병단은 총 아홉명만이 귀환했다. 돌이킬 수 없이 둘만 남은 지금, 새로운 거리감에 휘청이는 것이 리바이 하나일 리 없었다. 서로밖에 남아있지 않은 너무 조용한 방은 자꾸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게 했다. 들러붙어오는 외로움과 애틋함의 덩어리들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리바이는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한지의 얼굴을,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같이 보내온 시간들을 더듬어 만지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한지는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한지가 무시하고자 한다면. 그녀가 그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면 그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엘빈의 빈자리로 그녀를 몰아넣은 것은 그였기 때문이다. 결과를 져야 하는 게 자신 혼자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리바이는 선택을 내렸고, 한지는 말없이 그녀의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였다. 한지의 침묵이 차라리 자신의 벌이길 바라는 리바이가 그녀가 그은 선을 넘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가 누구를 보고 바보같다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늦은 시간에 불이 켜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단장실에 들어와 본 자신의 충동이 한심해서 리바이는 한숨을 삼켰다. 어쩌면 자신은 깨어 있는 한지를 변명 없이 마주치려고 들어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되는 대로 지껄인 문장들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찾아내는 것은 리바이가 아닌 한지의 장기였다.
정리는 금세 끝이 났다. 애초부터 황량한 감이 있던 단장실에는 치울 것이 많지 않았고, 그가 방에 머물 이유는 빠르게 사라졌다. 리바이는 공연히 한지의 안경을 여러 번 닦았다. 제 앞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잠든 여자도, 답지 않게 투명한 안경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리바이는 술에 취해 뻗은 제4분대장을 망설임 없이 들쳐메고 그녀의 방에 던져놓았을 것이다. 고작 몇 달 만에 한지는 단장이 되었고 동료들은 수없이 죽었으며 조촐한 술판에 그는 초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씁쓸해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바빴다.
더 이상 뜸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리바이는 한지가 앉은 의자에서 병복 코트를 들어올렸다. 그것을 그녀의 얕게 오르내리는 어깨로 옮기는데 걸리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한지를 이 정도 거리에서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가 등을 돌려 나가면 다음은 언제가 될 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따위 생각을 해서였을까. 코트가 어깨에 닿자 한지는 움찔 떨더니 짧은 숨을 들이켰다. 젠장, 리바이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그는 그제서야 제가 이 방에 너무 오래 머물렀음을 인정했다. 마치 일어나기를 기다린 것과 다름없는 행동들이 꼴사납기 짝이 없었다. 낮게 신음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한지로부터 리바이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어버린 머릿속에는 조용하게 방을 떠나는 것만이 해결책으로 떠올랐다.
그는 책상에서 빠르게 멀어졌지만, 빌어먹을 단장실이 너무 넓었다. 문으로 향하는 리바이의 등 뒤로 코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쇳소리 섞인 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미안. 누구지? ...리바이?
한지가 부른 그의 이름에는 졸음만큼이나 당황이 티나게 섞여있었다. 답을 해야 할텐데 달리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었나, 같은 멍청한 생각만이 떠오른 덕분에 리바이는 잠깐을 말 없이 서있어야 했다. 말라버린 목구멍이 헛기침을 뱉었다. ...일어났냐. 겨우 쥐어짠 한마디와 함께 그는 한지를 돌아보았다. 안경 없이 살짝 붉어진 눈으로 그의 방향을 보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를 보는 게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한지에게 리바이는 다시 말을 건넸다. 정신 차렸으면 침대에 가서 자라.
대꾸를 기대하지 않은 말이었고, 그는 다시 기묘한 긴장이 가득한 방을 벗어나려고 했다. 애초에 뭘 하러 들어온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리바이가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냥 가는 거야? 한지가 물었다. 그건 질문이었지만 무척이나 혼잣말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들어서 침대에 던져놓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네가 그런 걸 바라는 줄은 몰랐네.
하하, 그건 아닌데. 한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가벼워지는 마음이 분했다. 피곤과 피곤을 가리려는 농담들. 예전의 그들 사이에서 매일같이 공유되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여전히 조금 미소지으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나는 그냥 옛날에는 그랬다고 말하는거야. 마치 쓰레기라도 치우듯이 말이야, 너도 알지? 괜히...
한지가 말끝을 흐렸다. 리바이는 그녀가 얼마나 취했는지 가늠하는 것마저 어려워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미소는 흐려지고 한지는 곧 약간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미안, 취해서 그렇다. 못난 상관을 둔 병사장이 이해해 줘.
리바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바람에 단장실은 너무도 빨리 조용해졌다. 그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도 안되게 황량한 방도, 멍청하게 서 있는 자신도, 예전만큼 떠들지 않는 한지도. 하나 남은 눈 밑에 깊은 그림자를 달고 있는 여자에게 리바이는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과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에 동시에 시달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잘 자, 리바이.
그 말을 듣고 그는 완전히 한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저 망할 여자가 왜 자신이 잘 잠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자신에 당황한 한지가 허리를 세우는 것이 보였다. 리바이 잠깐, 왜, 무슨 일이야? 우리—으악!
저항조차 약해진 것 같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술 때문이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단장의 체력을 걱정해야 할 것이었다. 팔을 휘젓는 한지를 가뿐히 제압한 리바이는 무릎과 어깨 밑에 팔을 넣어 그녀를 들어올렸다. 놔 달라고 난리를 치던 것도 잠깐, 한지는 머리가 울리는지 목을 웅크리고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아마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라 그는 코웃음을 쳤다. 토하지 않도록 조심이나 해라, 망할 안경.
그거 아직도 기억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한지가 답했다. 까먹을 리가, 그 날은 그들이 각각 병사장과 분대장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한지가 화려하게 장식한 셔츠는 두 번 빨아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대꾸하는 대신 그는 품 안의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정리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가벼워진 것 같은 무게는 불만이었지만 어깨에 닿아오는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은 나쁘지 않았다. 체념했음에도 옅은 당황이 섞인 표정을 더 볼 수 있다면 막사를 한 바퀴쯤 더 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단장실에 딸려있는 사실의 침대에 도착해 그는 한지를 내려놓았다. 무릎을 꿇은 그를 본 한지가 어깨를 잡아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리바이는 그녀의 부츠를 벗겨 옆에 정리했다. 신발을 신은 채로 침대 위에 뻗게 둘 수는 없었다. 한지를 제대로 눕히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건 매일이라도 해줄 수 있어.
사실 해주고 싶은 편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안대를 풀기 위해 가져간 손은 그녀의 손끝에 붙잡혔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눈 하나를 마주하며 리바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네 부하고 동료다. 그러니까… 술 상대가 없으면 불러도 좋아. 네가 게르거 녀석이냐, 혼자 술을 마시게.
한지의 얼굴에 잠깐 떠오른 놀라움은 곧 느릿한 미소가 되었다. 그러게. 병단에서 술을 혼자 마시는 놈은 게르거 정도였던가. 게르거는 중독이었지 아마? 나 심각하네..
자조의 말을 들으며 리바이는 그의 손을 잡은 손가락을 한 번 문지르고 떨어뜨렸다. 부드러운 온기는 오래 잡을수록 놓기 어려워질 것이었다. 고마워, 리바이. 하품을 크게 한 단장의 눈가에서는 졸음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자라. 짧게 답한 리바이는 이번에는 정말로 단장실을 나섰다. 그 역시 침대로 돌아가 오지 않는 잠을 청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