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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즈 메리 미​

please marry me 

제목: 플리즈 메리 미

 

0.

 

"나랑 결혼해줘."

 

  창밖에서 함박눈이 쏟아지는 고층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던 남자가 맞은편의 여자에게 말했다.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천장에 매달리고,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레스토랑 안은 상당히 로맨틱한 분위기이긴 했다.

 

  한데 청혼하는 당사자의 표정은 더없이 담담하다. 누가 듣는다면 '결혼해줘'가 아니라 '저기 있는 티슈 좀 집어줘' 정도의 권유로 들릴 만큼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수천 송이의 장미꽃도, 몇십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없었다. 여자의 표정도 전혀 방금 애인에게 청혼받은 장본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안. 결혼은 싫어."

 

마찬가지로 '여기'하고 티슈를 건네주는 사람 같은 여상한 거절이 튀어나왔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리바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도 낙담하거나 곤란한 기색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둘의 식사는 말없이 이어졌다. 그야 둘 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처음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로써 리바이는 한지에게 열두 번의 청혼을 했고, 열두 번째로 퇴짜를 맞았다. 서글프기 그지없는 성탄제 전야였다.

 

포기라곤 모르는 끈질긴 남자 리바이의 첫 번째 청혼은 약 삼 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1.

 

둘의 첫 만남은 리바이와는 오랜 친구인 앨빈, 미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리바이. 이쪽은 한지야. 한지, 이쪽은 리바이.“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로 키가 많이 작네요?“

 

”엘빈, 너…내 얘기를 어떻게 한거야?“

 

이십 대 후반의 한지는 예의를 차리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새로운 얼굴이 있는 술자리는 시끌벅적하게 이어졌다. 엘빈의 회사 후배라는 한지는 칙칙한 남자들만 있는 자리에도 서슴없이 녹아들었다. 술이 들어가니 요란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리바이는 전혀 모를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긴 했지만.

 

한지의 길고 긴 이야기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홀짝이는 맥주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결국, 그날 과하게 신이 난 한지는 코가 비뚤어지도록 취해 리바이의 등에 업혀 집에 들어가야 했다. 왜 하필 리바이였냐면 그냥 집이 가깝기도 했고 한지는 왠지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는 타입이었다.

 

"버릇을 잘못 들였어."

 

자신이 오는 술자리마다 리바이가 있으니 괜찮다며 부어라 마셔대는 한지를 본 리바이가 중얼댔다. 한지의 친구인 나나바까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다섯 명이 된 그들 무리는 자주 모임을 가졌다. 신나서 500cc 술잔을 들어 맥주를 쏟아붓는 한지를 보며 리바이는 오늘도 자신이 기사 노릇을 해야 할 것임을 예상했다. 엘빈은 툴툴대면서도 싫은 기색은 없는 리바이를 보며 실실 웃었다.

 

역시나 한지는 오늘도 주량을 넘겨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미케는 나나바와 함께 돌아가고 앨빈은 혼자 택시를 타고 쏙 사라졌다. 리바이는 한숨을 쉬며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를 간단하게 둘러업었다.

 

"가자."

 

"우웅…."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리바이의 곁으로 시원한 밤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젠 익숙해진 한지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소파 위에 내려놓자 눈도 뜨지 못한 한지가 그를 잡았다.

 

"한잔 더 하고가."

 

집에 데려다주는 그것까진 아슬아슬 친구로서의 경계선에 걸쳐있다고 볼 수 있을 터다. 단둘이 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 아무래도 게임오버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바이는 나가려던 몸을 다시 한지의 방바닥에 앉혔다. 빈 맥주캔이 하나둘 쌓여가고 어느새 리바이도 눈앞이 핑핑 돌았다. 마지막 기억은 왠지 눈을 빛내며 네발로 기어오는 한지의 모습이었다.

 

눈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오른 아침이었다. 출근할 필요가 없는 주말이라 천만다행이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숙취에 미간을 구기며 몸을 일으키던 리바이는 경악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지가 옆에 잠들어 있었다. 팔자 좋게 늘어진 얼굴을 당황하며 바라보다 문득 밑을 보니 제 몸도 태초의 전라와 다름없는 상태였다.

 

잤구나.

 

리바이는 이를 악물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인사불성이었던(사실 한지는 리바이한테 업혀서 집에 오는 길에 술이 다 깼다) 연하의 여자를 덮치다니(사실 먼저 자빠뜨린 건 한지였다) 제정신인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던 한지가 슬쩍 눈을 떴다. 알몸인 리바이와 그의 절망스러운 표정에 상황은 곧바로 파악되었다. 리바이가 냅다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한지. 내가 술에 취해서 경황이 없었다."

 

"어? 아냐 아냐. 나도 나쁘지 않았고……."

 

당황한 한지가 꿇어앉은 리바이를 만류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리바이에게 관심이 있어 끈질기게 취한 척을 하고 집까지 유인한 한지가 사과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책임지라고 해볼까, 라고 잔꾀를 부리려던 순간.

 

"책임질게. 결혼하자."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농담인 줄 알았는데 리바이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기겁한 한지가 그럼 일단 연애부터 시작해보자며 설득해 둘의 사이는 '애인'으로 정해졌다. 이게 리바이의 첫 번째 청혼과 첫 번째 퇴짜였다. 갑작스러운 시작이었지만 둘의 연애는 삐거덕거리면서도 순조롭게 나아갔다.

 

 

2.

 

두 번째 청혼은 연애한 지 삼 개월쯤 되던 날이었다.

 

리바이는 한지의 더러운 방을 청소해준다는 핑계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정비공 일을 하고 있던 리바이는 퇴근하면 으레 자신의 집이 아닌 한지의 집으로 향했다. 연구원이라 야근이 잦은 한지를 기다리며 어김없이 더러워진 집을 적당히 청소하고, 그러다 보면 배가 고파 이인분이 좀 넘는 양을 요리하다 보면 한지가 귀가했다.

 

"맛있는 냄새! 리바이, 나 배고파. 배고파 죽겠어."

 

한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요리 중인 리바이의 등을 덥석 끌어안았다. 단단한 어깨에 슬쩍 뺨을 비비자 리바이가 쳐다도 보지 않으며 밀어냈다.

 

"불 쓰고 있으니까 떨어져라."

 

"리바이는 구두쇠."

 

짐짓 토라진 척을 하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둘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배가 아주 고팠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골을 한지는 열심히 불어가며 먹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한지는 너무 맛있어. 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내일부터는 야근해야 할 것 같아.“

 

”또?“

 

”응. 맨날 이렇지 뭐.“

 

한지가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는 인력을 갈아서 운영하는 대기업이었다. 엘빈도 늘상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대충 어떨지 짐작이 갔다. 한지는 한 번만 푹 쉬어보고 싶다며 툴툴댔다.

 

”장기 휴가받으면 페루에 가보고 싶어.“

 

”그런가.“

 

”응. 나스카 지상화라고 알아? 엄청나게 커서 외계인들이 그렸다는 소문이 있는데…“

 

딱히 맞장구 외에는 별말이 없는 리바이는 개의치 않고 한지는 자신이 가고 싶은 여행지들을 늘어놓았다. 그 여행지들이 휴양지나 관광지보다는 유적지나 오지가 많은 게 한지다웠다.

 

보글보글 끓는 전골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자 따듯한 온기가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문득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리바이에게서 자신조차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한지, 우리 결혼할까."

 

국물을 가득 담은 숟가락을 앙 물고 있던 한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 당황해버린 리바이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한지는 볼을 붉히며 배시시 미소지었다.

 

"리바이는 진도가 너무 빠르다니까."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낯이 화끈거려 리바이는 눈을 옆으로 돌렸다. 거절이었을지 아니면 돌려 말한 승낙이었을지 그로선 알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리바이는 좀 더 캐물어 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어쩌면 단 한 번뿐인 승낙의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3.

 

‘은퇴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야?’

 

함께 침대에서 나가지 않고 뒹굴던 주말 오후, 한지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었다. 리바이는 아득한 미래라서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지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포부에 대해 늘어놓았다.

 

‘난 재단을 만들 거야. 그때쯤이면 난 내 연구성과로 빚어낸 업적들로 유명해질 수 있겠지? 그럼 난 그 돈으로 재단을 설립해서 내 이름을 붙일래. 학생들한테 장학금도 주고, 젊은 연구자들도 지원하면 좋겠지.’

 

한참을 행복하게 말하던 한지는 선심을 쓴다는 듯이 덧붙였다.

 

‘리바이가 늙었다고 집에서 놀기만 하면 불쌍하니까 재단 건물 청소부 정도는 시켜줄게.’

 

‘필요 없어.’

 

‘그때 가서 아쉽다고나 하지 마시지.’

 

헛소리를 지껄이는 한지의 입술은 곧 리바이에 의해 막혔다. 한지가 팔을 들어 리바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둘은 곧잘 주말 내내 나가지 않고 커다란 창문이 있는 한지의 안방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채우면 또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와 노닥거리다 입을 맞추는 게으른 하루. 둘은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리바이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4.

 

둘을 이후로도 일 년을 더 만났다. 그동안 셀 수 없는 작은 다툼들과 두 번의 큰 싸움이 있었다. 보수적이고 꽉 막힌 리바이와 상식이 조금 부족한 한지가 연인이라는 틀 안에 함께하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길게 늘어놓기에는 지리멸렬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리바이는 한지를 놓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둘의 관계도 견고해지고 있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믿었던 건 리바이 혼자만의 희망이었을지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한지는 점점 연락이 줄어들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권태기인가 보지."

 

리바이의 고민 상담을 들어준 나나바가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일축했다. 옆에 앉은 미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몇 달 전 결혼식을 올렸다. 리바이와 한지 덕에 만난 인연이 그들보다도 빠르게 결실을 보았다. 절친의 좋은 소식을 축하하면서도 리바이는 마음속 한구석이 석연치 않았다.

 

 

5.

 

[오늘 퇴근하고 뭐하냐.]

 

[야근할 거 같아. 일이 끝이 보이질 않네.]

 

[그럼 내일은?]

 

[미안. 이번 주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이번 주가 안된다면, 다음 주는? 다음 달은? 내년은? 나는 십 년 후에도 네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리바이는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다시 속으로 삼켰다.

 

 

6.

 

한지가 드디어 리바이를 만날 시간이 난 건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한 지 삼 주나 흐른 후였다. 그간 리바이는 많은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는 게 역력한 그녀의 태도에 배신감이 치밀었다. 그래서 그는 반쯤은 너도 당해보라는 심보로 한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루에 몇 통씩 주고받던 전화나 메시지도 없이 일주일 정도 보내고 나서는 서글퍼졌다. 이미 한지는 리바이의 일상에 너무 깊이 스며든 지 오래였다는 걸 새삼 알게 된 탓이었다. 리바이는 자신 또한 한지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지금으로선 정말로 그러한지 알 수 없었다.

 

리바이는 한지가 보고 싶을 때면 둘이 나눴던 메시지 함을 들여다보곤 했다. 둘 다 사진을 잘 찍지 않아 앨범에는 서로의 사진이 거의 없었다. 거의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사진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없기도 했다. 한지와 연인이 된 이후로 가장 오래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앞으로는 한지와의 시간을 낱낱이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는 리바이는 화나거나 슬프지 않았다. 단지 둘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기만을 원했다. 그는 반지를 주문하고 꽃다발을 예약했다. 둘의 앞날이 앞으로도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받고 싶었다.

 

"많이… 바빴나 보군."

 

오랜만에 본 한지는 얼굴이 꽤 상해있었다. 푸석해진 머리칼과 좋지 않은 안색이 마음이 쓰였다. 한지는 옅게 웃으며 "그랬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맵지 않은 메뉴를 여러 개 시켜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근황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심란한 마음과는 다르게 한지와의 시간은 안온하고 소소하게 흘러갔다.

 

“이제 추워지려나 봐.”

 

“들어갈까?”

 

“아냐. 좀 걷자. 간만인데.”

 

선선해지기 시작한 밤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오늘의 한지는 어딘가 낯설었다.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말수가 적고 시선이 자꾸 먼 곳을 향했다. 리바이는 그게 한지의 마음이 떠났다는 징조처럼 느껴져 목 안이 갑갑했다.

 

말없이 걷던 둘의 손등이 문득 스쳤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던 손을 리바이는 왠지 잡기가 망설여졌다. 살짝 굳은 리바이의 손가락 사이로 한지의 손이 먼저 파고들어 왔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배긴 정비공의 손과 자잘한 상처가 많은 연구원의 손이 부드럽게 포개졌다. 리바이는 그 감촉만으로 가슴속에 맺혔던 응어리들이 풀어져 내리는 걸 느꼈다. 얼굴이 홧홧했다. 슬쩍 올려다본 한지도 옅은 미소를 띠며 귀 끝을 붉히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리바이가 한지의 손을 확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아주 잠깐 입술을 비비고 쪽, 하는 소리를 내고 떨어져 나가는 버드키스였다. 깜짝 놀라 이끌려갔던 한지가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는 거야…!”

 

한지가 입술을 손으로 숨기며 눈을 흘겼다. 딱히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은 둘의 애정행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한지는 질색을 했다. 그래도 리바이는 한지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자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어.”

 

“그래도!”

 

한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야 리바이에게 익숙한 한지 같았다. 심통이 나 먼저 빠르게 걸어가는 한지의 뒤를 느긋하게 쫓아가며 리바이는 남몰래 입가를 끌어올렸다.

 

 

7.

 

프로포즈를 준비하며 리바이는 상당히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의 만남 이후로 한지는 다시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리바이는 자신이 승낙받으리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그동안 둘이서 함께하며 보냈던 시간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한지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

 

일은 리바이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한지의 취향에도 맞을법한 심플한 반지와 평소 좋아했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상투적이지만 진심을 담은 멘트도 준비했다. 하지만…결과는 이번에도 거절이었다. 리바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미안해.”

 

“…….”

 

“미안해, 리바이…….”

 

고개를 젓는 한지의 표정이 어두웠다. 왜? 리바이는 납득 할 수 없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이유라도 말해줘.”

 

한지의 갈색 눈동자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리바이는 자신이 지금 구차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지의 손등을 덮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절박하게 물었다.

 

“왜 안 되는데? 이제…내가 싫어졌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왜 거절했어? 아니, 왜 나를 피했어? 사실은 헤어지고 싶었지.”

 

“리바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달라고!”

 

리바이의 억센 손이 한지의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아까부터 자신의 눈을 피하는 한지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정말로 관계를 끝내기를 원한다면 깨끗하게 선고를 해주길 바랐다.

 

리바이는 정말로 한지가 원망스러웠다. 한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리바이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한지에게서 성마른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거 놓고 이야기, 흐. 쿨럭!”

 

리바이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가슴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콜록 소리는 듣기만 해도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리바이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삼류 로맨스 소설에서나 봤을 것 같은 익숙한 전개가 제 삶에 벌어졌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지의 손에 묻어난 검붉은 혈흔을 봤을 때 리바이는 정말로 가슴속이 까맣게 무너졌다. 한지의 생명은 일 년 정도 남았다고 했다.

 

 

8.

 

한지는 십 년을 일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정을 들은 엘빈은 한지의 두 손을 꽉 잡고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말해줘.” 엘빈의 커다란 손과 진중한 말투와 눈빛 그 모두에서 따듯한 진심이 우러났다. 한지는 신변을 정리하고 긴 여행을 계획했다. 지구 반 바퀴를 도는 기나긴 여행이었다.

 

리바이도 개업 이래로 한반도 긴 휴가를 보내본 적이 없던 정비소의 휴업 공지를 걸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 한지에게 리바이는 자신도 동행하겠노라 우겼다. 어쩌면 한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수도 있었지만 리바이는 이번만은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한지와 보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바다 건너 타국에서 혹시라도 한지가 잘못되는 걸 상상하면 너무 끔찍했다.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창가 자리에 앉은 한지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곧 기체가 대기권의 구름 위로 떠 올랐다.

 

창밖의 광경을 보는 한지의 눈빛이 처연했다. 리바이는 하늘 대신 한지의 옆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한지가 리바이의 손을 잡아 왔다.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끼며 한지가 조용히 웃었다. 리바이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울컥 올라왔다. 눈이 뜨거웠지만 리바이는 울고 싶지 않아 기어코 참아냈다. 그동안 너무 바빴던 둘이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으니까.

 

첫 번째 여행지는 한지가 예전부터 가고 싶다고 했던 페루였다. 아주아주 긴 비행이 끝나고 내리자 뜨겁고 탁한 공기가 지금 지구 반대편으로 도착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둘은 버기카를 타고 고운 모래가 날리는 사막을 달렸다.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한 하늘과 샛노란 사막이 끝없이 이어졌다. 깊은 사막 안에는 와카치나라고 부르는 오아시스 마을이 있었다. 거창할 것 없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에서는 바지만 입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이거 마셔봐. 맛있다.”

 

그늘이 드리워진 선베드 위에 누워 둘은 시큼한 맛이 나는 요거트 음료를 천천히 마셨다. 한지가 건네준 잔을 받아 빨대를 쭉 빨자 끔찍한 단맛이 혀를 찔렀다. 윽. 하고 리바이가 미간을 구기자 한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막 마을의 노을 풍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둘은 모래 언덕에 버기카를 타고 올라 노을을 감상했다. 해가 완전히 지자 온도가 곤두박질쳤다. 리바이는 한지의 몸 상태가 걱정돼 점퍼를 둘러주고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허름한 숙소 안에서 둘은 퀴퀴한 침대에 함께 몸을 뉘었다. 한지는 잠결에 리바이의 품속으로 기어들어 매달렸다. 리바이가 한지를 꽉 껴안자 따듯한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리바이는 한지의 이마에 입술을 애틋하게 눌렀다. 해외에서의 첫 밤이 지나갔다.

 

“왼쪽을 보세요. 도마뱀이 보이죠? 원래는 꼬리도 있었는데 도로 착공 때문에 잘렸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번엔 저길 봐요. 저기에는 놀랍게도 거미 문양이!”

 

“오오…… 실제로 보니까 더 큰걸. 역시 고대문명은 위대해.”

 

한지가 가이드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한지가 보고 싶어 했던 나스카 지상화를 보기 위하여 경비행기를 타고 비행 중이었다. 비행기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지상화를 충실하게 보여주었다. 경비행기는 작은 기류에도 요동을 쳤다. 그래서 리바이는 꼴사납게도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리바이, 저것 좀 봐. 저것 좀 보라고!”

 

잔뜩 신나 한지가 리바이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깨가 흔들리자 리바이는 더 쏠릴 것 같은 기분에 사색이 되었다. 욱! 결국, 리바이가 토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먹은 걸 쏟아냈다. 혹시 몰라 봉지를 준비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리바이, 많이 힘들어?”

 

“괜찮으니까 구경이나 더 해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바이를 돌아보는 한지를 어서 더 보라며 밀어냈다. 힘들긴 해도 참을 만했다. 신기하게 아직 한지의 몸 상태는 시한부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래서 리바이는 무엇이든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행 내내 둘은 한지의 병이라던가 앞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는 일이 없었다. 그저 당장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9.

 

중남미의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견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의 리바이와 한지는 눈이 덮인 캐나다의 옐로나이프 설원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팔이 잘 굽혀지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눈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북극과 가까운 지역이라 뼈까지 시려오는 추위였건만 한지는 오늘 오로라가 뜰 것 같다는 예보를 보고는 꼭 나가야 한다고 우겼다.

 

“많이 춥지. 리바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오늘 꼭 뜬다고 했어.”

 

“그래.”

 

사실 리바이야 이 정도 추위로는 끄떡없었다. 오히려 한지의 몸 상태가 더욱 걱정인데 도저히 말릴 수가 없어 그냥 포기하고 최대한 따듯하게 입혀 나온 참이었다. 얼굴이 발갛게 튼 한지가 말을 할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겹겹이 껴입게 하고도 불안해 옷 안에 핫팩까지 몇 개씩 붙이게 했는데도 영 불안했다. 리바이는 그들과 동행중인 현지 가이드에게 물었다.

 

“오늘 볼 수 있는 게 확실하긴 합니까?”

 

“그건 저도 모르죠.”

 

“예?”

 

무책임하게 들리는 대답에 리바이가 얼굴을 확 구겼다. 분명히 예고에는 오늘 오로라가 뜰 확률이 95%라고 했다. 그래서 이 무리를 감수하고 있는 건데 오로라가 뜨지 않는다면 나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한지에게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기상예보와 비슷해요. 뜰 가능성이 크다고는 해도 100%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오로라가 보일지는 신만이 압니다. 인간은 그저 이때쯤이면 오로라가 뜨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밖엔 할 수 없어요.”

 

“…그렇습니까.”

 

신만이 안 다라. 퍽 낭만적으로 들릴 법했지만, 지금의 리바이에겐 딱히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깟 자연현상보다는 한지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한지는 오히려 태연한 표정으로 리바이를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나 아직은 괜찮아. 정말 힘들면 바로 말할게.”

 

“꼭, 바로 말해야 해.”

 

“응.”

 

안심하라며 한지는 웃었다. 리바이는 흘깃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에 이르렀는데도 아직 밤하늘은 온통 칠흑뿐이었다. 이제 셋은 침엽수의 나무 밑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없던 한지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졸음에 겨웠을 뿐이었지만 리바이는 가슴이 덜컹거렸다.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이제 그 정도만 하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순간.

 

“저것 봐요!”

 

오로라가 떴다. 가이드의 신난 외침에 반짝 눈을 뜬 한지가 벌떡 일어났다. 리바이도 덩달아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둡기만 했던 하늘에 오로라가 뜬 광경은 마치 빛나는 레이스 자락이 드리워진 듯했다. 가이드도 하늘을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선명한 오로라가 뜨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아요. 운이 좋으시군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던 한지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름다워.”

 

옐로나이프의 밤하늘은 오로라뿐만이 아니라 쏟아질 듯한 별들로 가득했다. 그 찬란한 광채를 한지는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절대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새겨두려는 것처럼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했다.

 

리바이는 오로라가 아닌 오로라를 보는 한지를 계속 눈으로 좇았다. 이윽고 극장의 막이 내리듯 오로라가 숨어들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각이 지난 시각이었다.

 

“온몸이 다 얼었어.”

 

훈훈한 실내에 들어오자 한지의 안경에 뿌옇게 김이 올라왔다. 한지는 시야를 가리는 안경을 내려놓고 두껍게 챙겨입었던 옷을 한 꺼풀씩 벗었다. 리바이는 너무 빤히 보지 않으려 뒤를 돌아 공연히 짐을 정리했다. 침구의 주름을 펴던 리바이의 옆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지가 다가와 앉았다.

 

“마실래?”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에서 홍차가 우러나고 있었다. 자기 직전에는 홍차를 마시지 않는 그였지만 잠자코 받아들었다. 따듯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몸이 나른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리바이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의미로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있지, 난 이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뭐? 놀라 돌아보는 리바이에게 한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오로라를 보면서 생각했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까지 봤으니 더 이상의 여한은 없겠다고. 하고 싶었던 것도 다 해봤고. 심지어 당신이랑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충분해. 난 괜찮으니까 당신도 나한테 더 얽매이지 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돌아가면 끝내자, 우리. 당신은 당신 삶을 살아.”

 

“그만해.”

 

한지는 리바이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를 바라보는 리바이의 시선이 무섭도록 형형했다. 한지는 그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싫어졌다면 말해. 언제든 떠나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난 널 놓지 않아.”

 

한지는 매 순간 리바이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꼭 말로 고백하지 않더라도 그를 대하는 눈빛과 말투에서 리바이는 애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한지가 리바이를 사랑하는 한 그는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지는 당황한 낯이 되었다.

 

“이러지 마. 왜 헤어지자고 하는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

 

알고 있다. 한지 나름의 배려일 게 뻔했다. 하지만 리바이는 한지에게서 그런걸 바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제멋대로인 모습에 반하지 않았던가.

 

“일 년도 안 되는 결혼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떠난 후에 당신만 더 힘들어질 뿐이야. 괜히 잊기 힘든 기억들만 만들게 될 텐데…”

 

“잊고 싶지 않아서 나는 네 옆에 있는 거야!”

 

“…….”

 

드물게도 격한 목소리로 리바이는 화를 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진심이 튀어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너와 행복해지고 싶어. 한지, 나는 우리가 함께였다는 기억이, 증거가 필요하다고.”

 

“리바이…”

 

한지가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리바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쳐냈다. 아, 지금은 정말로 울 타이밍이 아니었다. 힘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한지일 터인데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한지가 옅게 웃으며 리바이를 끌어안았다. 리바이는 힘없이 한지의 팔에 이끌려가 그녀의 어깨에 어리광부리듯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리바이는 한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딱 붙였다. 리바이는 한지에게 떼라도 쓰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억지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로 삶의 의지를 잃은 듯 초연하기만 한 한지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난 도저히 결혼은 당신한테 미안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아 리바이는 한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눈물로 젖어 축축한 입술이 뜨겁게 뭉개졌다. 자신을 밀어내는 손을 붙잡아 가슴팍에 붙였다. 쿵, 쿵, 하고 울리는 심장박동이 손가락을 타고 한지에게로 전해졌다. 어느덧 한지도 입을 열어 리바이의 입맞춤에 호응했다. 리바이는 한지에게 묻고 싶었다.

 

괜찮아, 정말로?

 

삶에 여한이 없다는 말은 진심이야?

 

혹시나 긍정이 돌아올까 무서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까지도 리바이는 차마 묻지 못했다.

 

 

10.

 

여행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여행 내내 신기할 만큼 멀쩡했던 한지의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리바이는 그때 한지가 정말로 아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바싹 마른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발작하며 튀어 올랐다. 아악!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입에서 점점이 피가 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리바이도 하얗게 질렸다.

 

“가방, 가방 속에 약이, 윽.”

 

급하게 한지의 가방을 뒤지자 온갖 색깔의 약들이 봉지 안에 담겨있었다. 그중 한지가 지목한 걸 골라 먹이고 휴대용 호흡기를 꺼내 대주었다. 점차 한지의 경련이 가라앉고 몸의 떨림도 잦아 들어갔다.

 

여행을 더 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 둘 중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날 바로 리바이는 한지 대신 온갖 예약들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매했다. 리바이는 한지가 걱정스러워 저금을 털어 가장 빠른 시간대의 퍼스트 클래스 표를 샀다. 한지는 비행 내내 약 기운에 절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 빠져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리바이는 생각했다.

 

귀국 이후 한지는 잠깐 입원했다 얼마 되지 않아 퇴원 절차를 밟았다. 그래도 되는 거냐고 걱정하는 리바이에게 한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병이 나을 일은 없으니까 몸 상태가 크게 나쁜 게 아니라면 병원에서 지내고 싶지는 않거든.”

 

리바이는 정비소 운영은 거의 믿을만한 직원에게 맡겨놓은 채로 한지와 시간을 보내는 데 열중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옆에서 자리를 지키며 간호했고, 집에서 지낼 때면 나름대로 그녀를 챙겨주려 노력했다.

 

눈물을 더 흘리지는 않았다. 리바이의 마음은 점차 단단해졌다. 한지가 자신의 병을 받아들인 만큼 리바이도 의연하게 그녀를 지지하고자 했다. 다만 한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바이는 지칠 줄 모르고 한지에게 결혼하자며 프로포즈했다.

 

한지가 입원해있던 병원 독실에서 한번.

 

퇴원하던 날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길에서 한번.

 

집에서 잘 나오지 않기 시작한 한지의 식사를 챙겨주려 들렸던 날에 한번.

 

첫눈이 올 때, 함께 크리스마스의 저녁을 맞았을 때, 어느덧 봄이 와 벚꽃이 폈을 때, 그냥 문득 한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던 모든 순간마다 청혼했다. 거절이 돌아와도 괜찮았다. 리바이는 자신의 마음을 한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11.

 

약속됐던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한지는 마지막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생존율은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고 했다. 치료가 목적이라기보단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것에 가까웠다. 한지는 수술을 앞두고도 태연했다.

 

“어떻게 보면 생존율은 1대1이라고도 할 수 있지.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니까.”

 

리바이로선 웃을 수도, 그렇다고 반박을 할 수도 없는 농담이었다. 요즘 둘의 대화는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적막이 흐를 때면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애써 둘은 평소처럼 지내려고 노력했다.

 

둘은 불안해하면서도 서로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 흘러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누구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점차 리바이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다. 눈을 붙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한지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끔찍한 꿈이었다.

 

마침내 수술 날이었다. 리바이는 결국 한지의 수술까지 옆에서 지키러 따라왔다. 끝까지 충실한 연인을 보며 한지는 가슴이 아팠다. 수술대 위에 누운 자신의 손을 잡은 리바이를 애틋하게 보다 손짓했다. 다가온 리바이의 귀에 대고 그만이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면 지금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내 삶의 가장 큰 미련은 당신이야.”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넘실거린다. 리바이는 한지의 손을 잡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실은 무서워, 리바이. 당신을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곧 수술실로 들어가야 하는 탓에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수술실 문이 닫히는걸 리바이가 망연하게 바라봤다. 그는 그 앞에 앉아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불길하게 깜박이는 수술실 사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한지의 말이 맴돌았다. 꽉 쥔 주먹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얬다.

 

영겁과도 같게 느껴졌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수술이 끝났다.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나왔다. 벌떡 일어났지만 리바이는 차마 결과를 물을 수 없었다. 한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의사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리바이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12.

 

하늘과 맞닿을 듯이 높은 절벽 위에선 마른 바람이 분다. 리바이는 그 정상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광활한 바위산이 끝없이 늘어진 광경은 장관이면서도 오싹했다. 붉은빛을 띠는 암석과 대비되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독수리 몇 마리가 가로질렀다. 묵묵히 앞을 바라보기만 하는 리바이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때 뒤에서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바이!”

 

한지가 리바이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몸을 돌려 한지를 본 리바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두 사람의 손이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한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는 리바이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냐. 가자.”

 

이제 한지는 더는 오래 뛰어도 목이 아프지 않았다. 자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깨거나 목에서 핏물을 뱉지도 않았다.

 

지금 리바이와 한지는 또 긴 휴가를 낸 참이었다. 온종일 계획 없이 느긋하게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호텔로 돌아왔다. 리바이는 귀찮다며 씻고 나와 주저앉아 버린 한지를 붙잡고 드라이어를 켰다.

 

머리를 말리는 손길에 얌전히 머리를 맡긴 한지는 맥주캔을 따며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켰다. 제목만 아는 로맨스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런 거 말고 다큐멘터리를 보자며 채널을 돌리려는 한지에게서 리바이가 리모컨을 뺏어 들었다. 지루하다고 툴툴대면서도 한지는 영화를 보는 리바이의 옆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렸다.

 

어느덧 꾸벅꾸벅 조는 한지의 머리통을 리바이가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영화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곧 리바이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누구도 보지 않는 엔딩 장면에서 자막만이 홀로 깜박거렸다. 그 자막의 내용은 이랬다.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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