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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으로

​ 대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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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소리가 간헐적으로 멈췄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센조는 

머리를 대충 틀어 올려 묶으며 옆을 흘겼다. 초봄치고 열이 오른 날

씨였으나 뒷목이 서늘해지니 견딜 만도 한 것 같았다. 사계절 내내 

덮을 수 있을 듯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다시 엎드린다. 잘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도 상대의 노트북 화면이 눈에 선했다. 요령 없이 백

스페이스키를 글자마다 눌러 지우거나, 엔터는 유난히 세게 치는

거. 양 검지손가락은 꼭 정석대로 F와 J 위에 얹어두는데 손가락이 

굵어서 오타가 자주 나는 거. 그래서 타자가 느린 거. 답답하니까 

늘 노트북 옆에 냉수를 한 컵 두는 거. 하나같이 저다운 습관들이

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구긴 미간을 눌러보고 싶다

고 생각하며 센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에 철학 교양 듣는데,"

 "웬일이냐."

 "별로더라.

 

 

새로운 환경의 시작은 언제나 애매하다. 특별히 설레지도 들뜨

지도 지루하지도 않고 그냥, 그러려니. 오히려 그 정도의 적당한 변

화가 센조에게는 만족스러웠다. 쉽고, 편하고, 언제나와 같고. 예상 

밖의 상황들은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몬지로가 갑자기 전공을 바꿨

을 때처럼.

 

 

 "그러냐."

 

왜 하필 철학이야? 원래 목표대로 회계학과 갔으면 취업 걱정

도 덜하잖아. 질문이 목구멍까지 솟았으나 애써 눌렀다. 이미 수 번

이고 물었으나 답은 들을 수 없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의 철

학이 문제였다. 자신과 상대 사이 어렴풋한 거리감이 생긴 것도 정

확히 몬지로가 그간 준비해왔던 입시 계획을 전부 버리고 철학과에

가겠다며 설칠 무렵부터였다. 더 이상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거나 반박하거나 지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밀어지도 않는다. 포기한 것처럼.

 

 

다시 타자소리가 터덜터덜 울린다. 센조가 보기엔 퍽 초라한 

고집이었다. 처음 학과를 틀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상대가 바라지도 않는 조언을 늘어놓았다. 대입이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었고, 낙엽이 날리니 괜히 더 신경질이 났었다. 그

 와중에 추위를 많이 타는 자신에게 담요를 한 겹 더 덮어주는데, 어

찌나 화가 나던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할 시기에 몬지로마저 멍청한

 소리를 해대니 언짢았던 기억이 난다.

 

 

 '미쳤어? 이제 와서 바꾼다고?'

 '어.'

 '갑자기 왜? 취미로 하면 되잖아.'

 

 

그 즈음 이후로 주욱 느꼈던, 속을 읽을 수 없는 감각이 낯설

었다. 몬지로는 내내 시선을 피하다가 미세하게 웃었었다.

 

 

 '왜 화를 내냐? 네 일도 아닌데.'

 '…뭐?'

 

 

 

그때는 괜한 오기와 자존심으로 마음대로 하라며 자리를 떴지

만 조금 여유가 생기니 뒤늦게 의문이 샘솟는다. 대체 어디서 철학

에 매력을 느낀 건지.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뭔지. 자신은

 왜 화를 냈는지. 아직까지 지속되는 답답함은 대체 뭔지. 센조는 몸

을 일으켜 앉았다.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꿋꿋하게 타자만

 치는 상대를 지켜본다. 납득하고자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철학 교양

까지 듣고, 주말 아침부터 다짜고짜 몬지로의 자취방에 찾아와 하루

 종일 눌러앉아 있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불쾌한 기분이다. 아

무리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적어도 센조에게는 가깝지도 

달갑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정의니, 사회니, 올바름이니, 다 뜬구름 잡는 소리같아."

 "네 취향은 아니긴 하지."

 "철학자들은 다 당연한 얘기를 번지르르하게 하더라."

 

 

한번 의식하니 시계소리가 계속 귀에 들어온다. 핸드폰이 있는

데도 굳이 아날로그시계를 벽에 걸어둔 게 저답다. 투박하고 촌스러

운 무늬의 이불도. 방 전체에서 풍기는 아저씨 같은 냄새도. 한 켠

에 정갈하게 꽂힌 온갖 책들도. 안 어울리게 깔끔한 것도. 전부 녀

석이 철학을 선택한 이유일 테다. 한참이나 정적이 흐르자 참다못한

 센조가 대놓고 뱉었다.

 

 

 "왜 쓸데없는 공부를 해?"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센조는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다리

를 뻗고 벽에 기대니 꼭 저가 못 올 데라도 온 것 같았다. 들어도

 대꾸하지 않는 의도가 뭐겠는가. 뻔하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

리고 말에 가시가 돋는다.

 

 "무시하네. 선이라도 그어보게?"

 

 

몬지로가 키보드에만 고정했던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센조를

 향한다. 성에 안 찬다는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물론

 티를 내면 더 불쾌해할 테니 속으로 삼켰다. 몬지로는 센조가 원하

는 바를 알고 있다. 자신이 구구절절 설명하면 하나하나 근거를 들

어 논박하고, 끝내 자신이 설득되어 동의하길 바라는 거다. 저 독불

장군은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 신경도 안 쓰면서 유독 저에게만 달

라붙었다. 최고조를 찍었던 수험생 시절에는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

으나 입 밖에 내면 꽤나 자존심 상해할 걸 알아 굳게 다물고 있었

다. 눈치 채지 못하는 건지 인정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제 앞에서

만이라도 솔직해진다고 해야 할지.

 

 

 "들을 마음은 있냐."

 "아무렴."

 

 

쓸데없다고 못부터 박아놓고 퍽이나. 몬지로는 이번에도 속마

음을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센조도 바로 이런 태도에 짜증을 내는

거겠지만 굳이 듣기 싫을 말을 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래도 이대로

가다간 정말 화를 낼 것 같으니 말문을 트긴 해야 하려나. 어디서부

터 말해야 할까. 자신이 철학을 선택한 이유도 상대 때문이라는 걸.

 

 

 "너는 왜 경제학을 고른 건데."

 "합리적이니까."

 "그게 다냐?"

 "뭐가 더 필요해?"

 

 "넌 좀 더 세상을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또 침묵. 센조가 신경질적으로 잔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지금 나한테 충고하는 거야?"

 

 

의욕도 영양가도 없는 대화다. 그렇게 판단하자마자 센조는 겉

옷을 집어 들었다. 인사 없이 천천히 걸어나갈 때까지 몬지로는 시

선을 노트북에 고정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랍지도 않았

다. 상관없다. 어차피 대화는 자신들의 방식이 아니다. 상대는 알아

서 깨닫는 사람이니까.

 

 

 

 

 

 

 

 

다음 날은 계절을 뒤집어둔 것처럼 쌀쌀했다. 딱 한 사람분의

온기가 그리울 정도로. 습관적으로 빼곡하게 필기하던 센조가 저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렸다. 점심 즈음의 햇살은 꼭 알맞게 따뜻해 보

이는데 아쉽게도 자신과는 멀었다. 겉옷 더 두꺼운 거 입을걸. 속으

로 중얼거리다 다시 강의실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다. 내키든 아니든

점수를 잘 받는 건 센조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칸트가 말한 정언 명령이란……."

 

 

 

대충 자주 들어봤던 내용이다.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웬만

한 고전은 상식으로 읽어둔 터라. 신선하기는커녕 토씨 하나까지 비

슷한 문장들이 반복된다. 굳이 새겨듣다가 무심코 한숨을 쉰다. 복 

날아간다. 애늙은이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점점 시

야 한구석에 몬지로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녀석도 이런 수업을 듣

겠지. 인상 팍 쓰고 불만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중간중간 고개를 끄

덕일 거다. 전공책만큼이나 두꺼운 안경테를 이따금 추켜올리고, 필

기는 깔끔하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중얼대느라 눈총을 받을 수도

있고. 상상 속 몬지로가 자연스레 옆에서 말을 걸어온다. 너, 강의

들으면서 또 어디다 써먹을까 계산하고 있지. 몬지로는 뭐든 활용하

려 드는 제 가치관을 늘 못마땅해했다. 효율을 추구하는 게 왜 문제

라는 건지. 다시금 얕은 한숨을 뱉으며 턱을 괸다. 녀석은 이마를 

짚는다. 나 말고 누가 감히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겠냐. 삼키고 있

을 말이 들리는 듯하다. 저도 모르게 볼펜을 딸깍이다가, 교수의 시

선이 닿기 직전 센조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허상이 아닌 목소리

가 귓가에 콕 박힌다.

 

 

 "다시 말해,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그 단어의 배열을 듣자마자 모든 의문이 풀린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센조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늘 이런 식이지 않았는가. 끝

도 없이 생각을 하고,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든 전해지고. 서로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만으로 어느 순간 진전되곤 했다.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 곱씹자마자 몬지로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다. 수단을 찾아내는 건 네 특기지. 인정하고야 만다. 왜 짜증이 사라진 건지. 모

든 걸 계획하면서 왜 녀석에게만큼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지. 왜

 그 앞에서만 완벽해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의 목적이 뭔

지.

 

 

 '넌 좀 더 세상을 볼 필요가 있어.'

 

 

'그러니 네가 보지 않는 세상을 대신 공부하겠다'고, 뒷얘기까

지 하면 좀 좋은가. 하기사 설명했더라도 납득하지 않았을 거다. 갈

증이 해소되니 괜히 공기가 달았다. 센조는 그날 강의가 모두 끝나

자마자 달렸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호흡이 벅차도 불쾌하지 않았다. 

서두르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그 못난 얼굴도 볼만할 테니까.

 

 

여전히 날씨는 차가웠다. 돋다 만 나무순이 시야 한구석에 걸

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물이라도 먹은 듯 흐렸다. 뜀박

질을 할수록 후끈해지는 체온에 위화감이 든다. 손발은 시린데 심장

깨는 덥고, 이상하게 충동적이었다. 건물에 들어서 익숙하게 남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몬지로가 꼭 같은 자리에 있었다.

책상. 노트북. 두꺼운 책들. 냉수가 담긴 머그컵. 잠시 현관에 서서

숨을 고른다. 몬지로는 센조의 표정을 보자마자 헝클어진 머리카락

의 이유를 깨달았다. 눈이 마주친다. 몬지로가 먼저 움직인다. 센조

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배웅도 안 해줄 땐 언제고 습관처럼 다가

와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준다. 책상 구석에서 빗까지 꺼내와 긴

 머리칼을 매만진다. 몬지로가 쓰지도 않는 빗을 늘 꽂아두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철학으로 어떻게 먹고 살려고?"

 

 

대뜸 던진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온다.

 

 

 "돈이야 네가 벌어오면 되는 거고."

 

 

센조가 다시 가볍게 웃었다. 하는 말마다 어이가 없다. 뭘 자

연스럽게 같이 산다는 전제로 얘기하는 건지. 몬지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마저 빗겨주더니 머리끈 하나를 내밀었다. 바닥에 머리

카락 떨어뜨리지 말라는 뜻이다. 한결같이 투박하고 고지식한데다 

예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이런 양반의 목적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하긴 네가 살림은 좀 하지."

 

 

확실한 말이 오간 적은 없다. 애초에 센조는 말뿐인 서약을 믿지 않았다. 언어는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으니 믿는 건 스스로의 

판단력뿐이었다.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센조는 판단을 포기했다. 논증과 계산을 그만두었다.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널 목

적으로 대우해줄게. 어떻게든 전해질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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